"모든 것이 합의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합의되지 않은 것"(Nothing is
agreed, until everything is agreed)이란 말은 대북 협상의 키워드다.

북한의 태도가 워낙 변화무쌍 하다보니 최종 타결순간까지 어느 것 하나
확정적으로 얘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북과의 협상테이블에 앉아본 이들은 이런 말에 공감한다.

한두번 겪어본 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협상은 당연히 그래야만 할지도 모른다.

당사자가 있는 협상에서 확인되지 않는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그러나 이미 확인된 사실에 대해서까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그것은 정보에 대한 과신이거나 이해당사자들을 무시하는 태도다.

이른바 "페리 보고서"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 그 대표적인 예다.

"모든 것이 결정되기 전까진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다"는 식이다.

미국 국무부는 최근 외교경로를 통해 페리 조정관과 관련한 정보누출에
대해 한국정부에 항의했다는 후문이다.

페리 보고서의 내용,페리의 방북 등 대북정책과 관련한 일부 "민감한"사안
들이 한국언론을 통해 보도됐다는 것이 미국측의 항의 이유다.

미국의 이같은 태도는 상당히 의아스럽다.

언론 보도 내용중에 소위 정보라고 할만한 "민감한"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페리의 방북사실은 호놀룰루에서 열린 한.미.일 고위정책협의회에서
이미 알려진 내용이다.

페리 조정관 스스로 방북의사를 밝혔고, 이를 토대로 보고서의 최종문안을
정리할 계획임을 시사했었다.

페리의 방북시점 역시 마찬가지다.

추측보도 수준이었다.

문제된 페리 보고서의 내용이란 것은 이미 숱하게 "재탕" "삼탕"된 것들
이다.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없었다.

유독 한국 언론이 외교관계자의 말을 빌어 이같은 내용들을 기사화했다고
정보가 샌 것이라면, 뉴욕타임스나 워싱톤포스트가 한반도 관련 기사를
보도한 경우는 어떤가.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미국 관리가 한반도 관련 주요 정보를 언론에 흘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과민반응은 어쩌면 페리 보고서의 상당 부분이 한국
대통령을 통해 확인되는 것에 대한 억지일 뿐이다.

페리 보고서가 미국 의회와 행정부간의 "정치적 풋볼(political football)
게임"임을 감안한다면, 미국의 이같은 태도는 지나치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 이의철 정치부 기자 ecle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