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이 30일 "이회창 총재-이한동 대표체제"로 재출범했다.

지난 91년 3당 합동으로 탄생한 거대 여당 민자당이 당명까지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제3기" 총재를 배출한 셈이다.

3당 합당 세력은 그동안 김영삼 대통령을 만들었는가 하면 합당의
한축이었던 자민련 김종필 총재를 여권에서 몰아냈다.

또 민정계의 한 구심점이었던 박태준 당시 최고위원을 비롯해 박준규
이종찬 박철언씨 등은 YS 정권 출범을 전후해 야권으로 이탈하기도 했다.

합당후 두번의 총선을 거치면서 신한국당은 그 세가 상당히 위축됐고
당내 세력분포도 YS의 민주계가 다수파의 자리를 차지했다.

최대 계파였던 민정계는 쇠락의 길을 걷는 가운데 김윤환 이한동 고문 등을
중심으로 소그룹으로 나뉘어 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제 신임 이총재가 대통령 후보가 된 상황에서 민정계 상당수는 서서히
이총재의 핵심측근들을 축으로 하는 "신주류"에 흡수 당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계는 수적인 다수이면서도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임하자마자 각자 처한 입장에 따라 주류쪽에
합류하는 측과 비주류로 또는 확실한 반이 노선을 걷는 인사로 나뉘어지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이달 말께 출범할 "이인제 신당"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때문에 계파간 암묵적 합의나 당내 지지도에 상관없이 대세론에 따라 당권의
향배가 결정되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당내 여건하
에서의 "이회창 체제" 출범은 과거의 지도체제와는 사뭇 다른 정치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근대화 세력으로도 표현되긴 하지만 과거의 군부세력과 민주화 세력간의
권력승계 행태나, 보스 중심의 3김 정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데 신임 이총재
체제의 출범 의미를 찾을수 있다는 지적이다.

신임 이총재는 이제 확실한 정책과 노선을 정립, 당 안팎의 세를 결집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치적 의리나 인간적인 유대만으로는 더 이상 자신의 세를 확대하기
어렵게 됐다.

현재 당내의 여러 분란이나 내분 양상도 이총재가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게
되면 수습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대표와 노선을 달리하는 인사들은 탈당하게 될 것이고 당에 남더라도
더 이상 "이회창 흔들기"를 계속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반이 세력이 비주류로서 적극적 협력을 회피하는 사태는 이대표로서도
용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대표는 당권을 장악한 총재로서 그만큼 당을 확실하게 장악해 나갈 수단과
권한을 갖게 됐지만 그동안 "우산" 역할을 해온 김영삼 대통령이 2선으로
물러난 데 따른 부담도 안게 됐다.

일부 민주계 등 비주류에 대한 감싸안기가 한계에 이를 것이라는 다소
섣부른 관측도 나오고 있다.

신한국당이 지금보다 더욱 원심력이 큰 "흔들리는" 정치집단으로 변할
것이라는 일각의 지적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물론 이회창 체제 출범 이후와 관련한 이같은 비관적 전망은 근본적으로
이총재의 국민적 지지도가 미미하다는데 그 원인이 있다.

때문에 이제 이총재는 급락한 지지율을 끌어 올려야 하는 절대절명의 과제도
안고 있다.

당내에서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대선 승리 가능성을 점차적으로 나마
높여 나가야지 그렇지 못할 경우 내부에서 부터 거센 도전을 받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비주류측이 공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달 중순까지 지지율의 반등이 없을
경우 후보교체론이 제기됨은 물론 당권투쟁의 양상도 벌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반이 진영에 섰던 중진급들이 당 잔류를 공언하고
있는 것은 이대표 "낙선 이후"를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자아내고
있다.

또 현실적으로 이대표가 정권창출에 실패할 경우 대선 이후 그가 당권을
장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회창 총재가 전당대회 이후 당을 원만히 추스르고 범여권을 확실히 결속
시킬수 있느냐 또한 지지도에서 이인제 전 경기지사를 앞지를수 있느냐
여부가 신한국당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볼수 있다.

< 박정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