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이회창고문은 "대쪽", "법대로"라는
별명대로 원칙과 소신을 중시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법대 재학중이던 56년 고시에 합격(8회), 60년 약관 25세의 나이로
서울지법 인천지원 판사로 법조계에 입문한 이후 서울고법 판사, 법원행정처
기획실장, 대법관등을 거치는 동안 "대쪽 판사 이회창"이라는 독보적 명성을
쌓았다.

81년 신군부에 의해 45세의 나이로 최연소 대법관에 임명된 이후에도 86년
임기만표로 물러날때 까지 맡은 46건의 전원합의체 사건에서 무려 10건이나
소수의견을 냈다.

그가 대중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89년 중앙선관위위원장
재임 당시 타락과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돌연 사표를 던지면서 부터이다.

당시 선관위는 강원도 동해시와 서울 영등포을 재선거에서 후보와 선거
사무장등을 선거법위반 혐의로 고발했으나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리자,
그는 "불법선거운동을 막고자 최선을 다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해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며 스스로 물러났다.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대통령은 그때 이고문의 소신과 강직성을
눈여겨 봐,새정부 출범과 함께 그를 감사원장에 전격 발탁한다.

대통령의 지휘와 통제를 안받겠다고 공언한 "감사원장 이회창"은 관행화된
국무회의 참석과 연두정례보고를 중단했고 청와대비서실, 안기부 기무사등
권부의 핵심부서를 감사 도마위에 올렸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도 예외일 수 없었다.

평화의 댐, 율곡감사와 관련 두 전직대통령은 감사원의 서면조사를 받아야
했다.

93년 12월 문민정부 2대총리로 임명된 이후에도 법과 원칙을 강조해온
그는 결국 총리의 법적 권한 문제를 둘러싸고 청와대와 대립, 4개월만에
단명 총리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공직생활에서 보여 주었던 강직성과 청렴성은 높은 대중적
지지를 받았으며 그를 정치권으로 이끌어 결국 집권당의 대통령후보가
되도록 했다.

황해도 서흥출신.

이고문의 부친은 대검 검사를 지낸 이홍규변호사(91세)이고 대법관을 지낸
고 한성수씨가 장인이다.

부인인 한인옥여사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김태완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