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강경식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은 철저한 시장개방론자이자
경제안정론자.

강부총리는 5공화국때 전두환대통령 밑에서 비서실장을 지냈다는 "낙인"이
찍혀 김대통령에 의해 번번히 부총리 임명이 좌절됐으나 막판에 관운이
트였다.

강부총리(61)는 경북 영풍출신으로 집이 가난해 부산의 누님집에 기거
하면서 부산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 학교의 동기로는 서석재 신한국당 의원, 후배로는 최병렬 신한국당의원
등이 있다.

강부총리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에서 20여년간 재직한 경제통.

60년 고등행정고시 12회로 합격한 후 재무부 사무관이 됐으나 당시 기획원
과장이던 최각규씨(현 강원지사)의 추천으로 기획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부총리는 기획원에서 예산총괄과장, 물가정책.기획.예산국장,
기획차관보, 차관보 등 요직을 거쳤다.

5공초기인 기획원 차관보시절에는 서석준부총리, 김재익 경제수석 등과
함께 한자리수 물가달성, 금리인하 등 경제안정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82년 현실론을 주장하며 반대하는 보수기질의 재무부에 점령세력으로 입성,
차관과 장관을 맡으면서 은행민영화 금리인하 금융실명제추진등을 주도했다.

이때 기획원출신인 이진설실장 이형구국장 강현욱국장등과 함께 재무부로
옮겨가 정영의실장 이수휴국장 이규성차관보등 재무부 터줏대감들을
밀어냈다.

재무장관시절 이-장사건의 수습대책으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과
함께 금융실명제를 강력히 추진하다 민정당 의원들과 충돌하는 등 이른바
실명제파동을 일으키면서 "강경식"이란 별명이 붙기도.

강부총리는 83년 아웅산사건이후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당시 전대통령의 가족들이 정치에 관여하는데 불만을 표시하고
군출신의 청와대비서관 임명을 반대하면서 전대통령의 눈에 나 실장을
그만두게 됐으며 85년 12대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강부총리는 그후 93년 부산동래 보궐선거(민자)에서 당선됐으며 96년
동래을에서 15대의원(신한국당 의원)으로 다시 당선돼 3선에 올랐다.

강부총리는 철저한 시장주의 경제론을 주창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인호
경제수석비서관과 비슷한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부단히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는 인물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강부총리가 공무원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토대로 현실을 타파하려는 이상주의자로 남보다 앞서 생각하는 스타일이라고
평한다.

그는 무협지에서 대중소설까지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독서광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민정부 초기의 개혁정책을 추진하는데는 적합하지만 말기에
경제난을 수습하는데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하는 이도 있다.

강부총리는 지난 79년 기획원 기획차관보시절 물가가 급등하고 부동산투기
가 극심해지자 생필품 공급확대, 강력한 재정긴축, 투자계획조정, 산업
경쟁력 강화 등을골자로 한 "4.17 경제안정화시책"을 마련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철저한 안정론자다.

그는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한 경쟁체제와 자유로운 시장정립을 위한 규제
완화를 서둘러야 하며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쪽에서는 시장경제론자로 불리운다.

그는 특히 재경원이 수없이 규제철폐를 다짐했지만 실제로 된게 별로
없다고 지적한 점으로 미루어 부총리 취임이후 정부규제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작업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강부총리는 또 지난 82년 금융실명제를 처음으로 추진했으나 최근
금융실명제가 완화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기 때문에 향후 실명제가 어떻게
보완될지 주목되고 있다.

강부총리는 또 지난 94년 모 월간지에 "감사원의 정책감사는 폐지돼야
한다"면서 감사원 무용론을 제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또 컴퓨터에도 남달리 조예가 깊어 지난 72년 기획원 예산총괄과장을
하면서 처음으로 예산편성의 전산화를 이룩했으며 최근 국회에서 가상정당인
"사이버파티"의 창설을 주도, 컴퓨터를 통해 여론을 수렴하고 법안을 심의
하고 있다.

취미는 바둑과 등산이며 부인 조삼진여사(59)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고
있다.

< 김성택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