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한국망명을 선택한 정확한 이유는 즉각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김정일의 지도체제에 대한 반감, 군부내 강경파들과의
불화등이 동기가 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특히 북한경제의 피폐,수해와 식량난 극복문제및 대외관계등에서의 김정일
과의 노선불일치, 강경파의 득세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정부당국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시대변천에 뒤떨어지는 주체사상의 한계성 인식등이 겹쳐지면서
결국 "남행열차"를 타게 됐을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황은 특히 최근 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인사들에게 시대변천에 따른 주체
사상의 변화 필요성에 대한 개인적 고뇌를 알게 모르게 내비쳤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황은 북한내에서 한때 권력서열이 최고 13위에 오를 만큼 노동당의 실세
이자 원로였다.

그는 또 모스크바 유학시절 식당과 화장실 가는 길밖에 몰랐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학구파였고 김일성 종합대학 총장을 거친 북한 지식층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런 황이 주체사상의 "왕국"인 북한을 버리고 남행을 결심한 데에는 북한
체제 이데올로기의 붕괴와 북한 파워엘리트의 희망상실등의 상황이
겹쳐졌다고 볼수 있다.

북한내 강경파와의 불화설과 관련해서는 강경파가 온건파를 물리치고 세력
을 얻음으로써 온건파인 그로서는 운신의 폭이 좁아졌고 나름대로 "거세"에
대한 위기감도 작용했을 것으로 정부 당국자들은 보고 있다.

이는 식량난및 경제난등을 타개 위한 외교적 노력으로 4자회담 설명회참석,
남북경색국면 타개, 미국과의 적극적인 관계개선등에 총력을 쏟아온 북한내
온건파들이 최근 곡물협상 실패로 인한 반미감정 고조등으로 야기된 강경파
의 득세에 따라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12박 13일이라는 비교적 긴 방일기간동안 당초 예정됐던 일본
정계인사들을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대한
부담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황은 일본 체류기간동안 자민당의 외교책임자 야마자키 다쿠 정조회장
과의 면담이 취소되고 대북 단골 접촉창구인 노나카 히로무 의원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일정상의 차질은 뉴욕 4자회담 설명회의 연기와 과거 북한의
공작으로 추정되는 13세 일본소녀 납치사건이 다시 불거지면서 였지만
대북 쌀원조 약속등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북한권력층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일이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황은 침착하고 온순한 성격으로 두뇌가 명석해 매사에 논리가 정연하고
말이 적어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편이며 술과 담배도 안하고 남에게
흠을 잘 잡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같은 성격상 북한의 내부적 혼란과 권력암투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불안감을 느끼고 먼저 선수를 쳐서 남행을 결행한 것으로 볼수 있다.

아무튼 정부당국자들은 그의 망명요청을 "일대사건"으로 규정하고 "평양
정권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하는 상징적 사례"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건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