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대통령의 이번개각은 "국면전환"과 세계화 추진을 위한 "실무내각
구성"이란 두가지 측면으로 해석된다.

불과 1년1주일만에 단행된 전면개각의 시기선택이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건국이래 최대규모라는 폭과 인선의 결과 또한 마찬가지다.

김대통령은 지난10월초 정재석부총리의 퇴진에서 비롯된 몇몇경제장관들을
바꿀때만해도 대폭적인 개각은 고려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문제있는 몇몇장관에 대한 보각수준의 개편이 당초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후 국내사정은 예기치않은 방향으로 전개됐다.

성수대교 붕괴로 상징되는 대형사고가 잇따라 터지며 문민정부에 대한
국민의 애정이 냉각됐고 대대적인 정부조직개편으로 공직사회마저 동요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임박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96년 총선에 대비, 국민
화합을 전재로한 선거내각의 필요성도 대두됐다.

이런 총체적 요구에 대한 국면전환카드로 김대통령은 결국 "사상최대 규모
의 개각"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개각의 내용에 담겨있는 몇가지 뚜렷한 특징은 앞으로
김대통령이 펼쳐갈 집권중반기의 통치구상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주목
된다.

문민정부 출범후 단행된 몇번의 크고작은 개각과 이번개각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할수 있다.

우선은 그폭이 조각수준의 사상최대규모였다.

총리를 제외하고도 전체 25개부처중 21개부처의 장관 얼굴이 바뀌었다(신설
부처 포함).

역시 대폭이라던 작년말 개각때 바뀐 얼굴이 10여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조각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둘째 인물 등용 폭이 비교적 넓었다.

5.6공출신의 입각이 예상보다 적었지만 김용태내무장관 김윤환정무1장관등
민정계출신 정치인의 발탁이 두드러졌다.

민주계의 전진배치로 해석되던 지난 연말의 개각과는 사뭇다른 양상이다.

각료는 아니지만 요직중의 요직인 청와대비서실장에 6공시절 상공장관
출신이 임명된 것도 주목되는 일이다.

세째 하마평에 오르내린 인물이 많이 낙점됐다.

전체 25명의 각료중 3분의2정도는 언론등에서 사전에 오르내린 인물들
이었다.

특히 홍재형부총리 김덕부총리 권영해안기부장 한승수비서실장등 핵심요직
에 임명된 인물에 대해서는 2-3일전부터 언론들이 거의 확정적이라고
점찍었었다.

이는 곧 김대통령 특유의 깜짝쇼적 인사색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나름대로 여론검증을 거쳤다는 얘기도 된다.

이밖에 집권중반기의 슬로건이된 세계화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한 국제감각
을 갖춘 인물이 적지 않게 발탁됐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런 특징들을 종합하면 김대통령은 이번개각에서 "화합"을 강조한 흔적이
뚜렷이 엿보인다.

세계화의 효율적인 추진과 눈앞에 다가온 지자체 선거등을 감안한 결과로
풀이된다.

실무에 밝은 인물이 유임되거나 발탁된것은 역시 세계화의 효율적인
추진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대통령의 출범초기 내각이 개혁을 기치로 내건 실험성 내각이란 평가를
받은데 비해 이번의 경우는 오히려 "프로"를 우대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미 개혁의 방향이 정해진만큼 이제는 개혁의 완성에 더 무게를 실었다는
해석이기도 하다.

개인별로는 박관용청와대비서실장이 당초 예상됐던 통일부총리가 아닌
대통령정치특보로 물러앉은 점이 주목된다.

그는 부산 민선시장으로 출마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으로 이번개각과 관련한 우려의 시선도 없지 않다.

국면전환을 위한 개각카드를 너무 자주 쓴다는 지적이 특히 많다.

출범 2년이 채 안돼 4번째 총리가 등장하고 부처마다 2~3명째의 장관을
맞는다는 것은 일할수 있는 공직사회를 염두에 둔 처사가 아니라는 평가는
결코 흘려버릴 얘기만은 아닌것 같다.

< 김기웅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