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모가 수려하고 상당한 교양을 쌓았으며 패기에 차있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일제때는 독립운동가로, 해방후엔 조국통일운동가로 외길인생을 살고있는
송남헌옹(80).

그는 김구 김규식선생과 함께 지난48년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해서 만났던
김일성주석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얘기한다.

당시 송옹은 김규식박사의 비서실장이자 민족자주연맹 16명의 대표중
한사람으로 남북협상에 참여했었다.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우리 현대사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일성주석이
자기행위에 대해 뚜렷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죽은게 아쉽다"는 송옹을 비가
내리는 10일 아침에 만났다.

-김일성주석을 처음 만난건 언제였는가.

"남북협상이 열리던 지난48년 4월이었다. 4월19일 평양모란봉극장에서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열렸을때 의장단에 앉아있는 김일성주석(당시
호칭은 김장군이었다고 송옹은 설명했다)을 처음 봤다. 첫인상은 얼굴이
수려하게 잘 생겼다는 것이었다"

-인사를 나눈적은 언제였는지.

"회의기간중인 4월 22일 김주석이 김두봉씨의 안내로 남측대표단이 묶고
있던 평양상수리특별호텔로 찾아왔을때였다.

그때 김구 김규식선생등과 함께 수인사를 나눴다. 정식으로 명함을 건넨건
회의기간중 어느 점심시간때로 기억된다"

-남북회의기간중 김주석에 대해 받았던 인상은.

"남쪽에서 취재하러간 기자들과 기자회담을 할때였다. 남쪽 기자 한명이
''김장군께서 북조선에 들어온 이후 어떤 분야에 가장 힘을 쓰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주석은 ''지식인들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아끼는데 힘을 쏟았다.
왜냐면 후진국을 이끌고 가는데는 지식인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라고
서슴지 않고 답했다.

이 모습을 보고 전혀 무식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회의중
김주석은 주로 ''북조선정치정세''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때도 상당히 논리적
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일상적인 모습은 어땠는가.

"4월 25일경이었다. 모란봉극장에서 축하파티를 가졌는데 황주에서 많이
나는 사과로 담근 ''능금브랜디''(당시에는 대표적 독주였다고 한다)한 컵을
단숨에 들이키는걸 보고 시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마지막에 만난것은 언제였나.

"공식회의가 모두 끝난 48년 5월3일이었다. 귀경을 하루 앞두고 김규식
박사와 함께 집무실에서 김주석을 만났다.

그때 김박사가 ''역사를 생각하고 크게 활동해 주시오''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시자 김주석은 마치 손자가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태도로 ''선생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선배를 대하는 태도가 무척 겸손하다고 느꼈다"

-김주석에 대한 평가가 무척 긍정적인것 같다.

"그런건 아니다. 당시엔 민족진영에 섰던 공산진영에 섰던간에 독립운동을
같이 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할수는 있지만 분단이후
국가경영은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송옹은 구체적으로 6.25남침, KAL기
폭파등 대남정책, 군비증강으로 인한 북한 경제파탄을 꼽았다)"

-김주석의 존재는 언제 처음 알았는가.

"청년시절에 신문을 통해서 압록강지역에 김일성부대가 출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후 지난43년 ''단파방송청취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복역중 후에 북한
부수상을 지낸 박금철로부터 ''보천보사건으로 들어왔다''는 얘기를 듣고
김주석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알았다"

-남북협상당시 김주석은 36세에 불과했다. 70세에 가까운 김구 김규식선생
이 실질적인 대화파트너를 인정할수 있었는가.

"이력이야 어쨌든 당시 김주석은 북한의 실력자임에 틀림없었다. 분단만은
막아야겠다는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본다"

-김주석사후의 북한정세를 어떻게 보는지.

"김정일을 중심으로해서 이전과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본다. 남북협상
당시 항일독립운동가자손을 대상으로한 ''혁명가유아학원''을 돌아본적이
있다.

이 유아학원이 유명한 ''만경대학원''이다. 김정일을 비롯 만경대학원출신들
이 북한의 노동당과 군, 정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이 김정일체제의
바탕이 될 것이다.

문제는 김정일이 얼마나 국가경영를 잘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

송남헌옹은 충남보은에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지난43년 "단파방송청취사건"으로 구속돼 1년여의 수감생활을 했다.

해방이후엔 김규식박사의 비서실장으로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중간파로
활동, "좌.우합작위원회" 우익측비서를 지냈다.

5.16쿠테타직후에는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3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송박사는 지난 90년 자신의 경험을 모은 "해방3년사"라는 책자를 발간하고
민족통일촉진회대표로 활약하는등 평생을 조국통일운동에 몸바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