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주석의 사망은 일단 북한에 김정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김주석이 생전 자신의 사후에 대비, 김정일에로의 권력승계작업을 사실상
진두 지휘해왔고 이같은 작업은 이제 북한의 권력층이나 주민들에게 있어
"기정사실"로 인식되고 있는 때문이다.

김주석의 사망을 공식보도한 북한의 방송매체들이 김정일에로의 권력승계와
충성심의 고양을 강조하고 있는데서도 이같은 북한당국의 의지는 잘
나타나고 있다.

김정일의 후계자지위가 북한에서 공식화한 것은 지난 80년10월 당6차대회
부터였다.

그는 81년6월부터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로 불리기 시작했고 현재
까지도 그렇게 불리어 왔다.

이제 그에게 김주석이 갖고 있던 국가주석, 당총비서직의 승계가 이루어질
것은 분명하다.

김정일은 절대적 독재자의 아들로서 이미 군은 완전 지배하고 있으며
노동당은 물론 이데올로기부문도 독점하고 있는 상태다.

김정일은 지난해 4월 국방위원장에 취임함으로써 모든 군사조직을 장악하고
있다.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모택동의 말처럼 그는 인민군을
비롯한 인민경비대, 노농적위대등 모든 군사조직을 지휘하고 있다.

어느 국가나 조직이든지 권력은 인맥장악에서 나온다.

현재 북한에서 김정일의 막강한 권력도 핵심권력기구 요소요소에 포진하고
있는 "김정일의 사람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노동당 핵심기구의 하나인 당중앙군사위원회의 경우 현재의 16명위원
가운데 12명이 만경대혁명대학원을 거쳐 구소련에서 군사교육훈련을 받은
김정일의 학원동문들인 것을 보면 인맥장악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김일성은 생전에 "부자세습"을 반대하던 수많은 당료들을 숙청이라는
이름으로 권력무대에서 제거, 김정일에로의 권력이양에 따른 과정을 마무리
했다.

김정일은 합영법으로 대외개방가능성을 모색하는가 하면 90년이후 대외
개방과 남북관계변화등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KAL기폭파사건의 친필지령이라든지 북한핵과 이용한 긴장국면조성
등도 그의 최종판단을 거친 것으로 알려지는등 국제사회에서는 "판단과
분석이 불가능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김정일은 41년 2월16일 김일성의 전처 김정숙과의 사이에 소련의
사마르칸트에서 태어나 64년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80년부터 정치전면에 나서기 시작, 당중앙위원, 정치국위원, 군사위원으로
선출됐고 지난 86년5월 김일성이 "조선노동당 건설의 역사적 경험"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되었음을 시사, 국제사회의 주목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91년12월 인민군최고사령관에 추대, 김정일시대의 도래를 본격적으로
대내외에 알렸고 지난해 4월 국방위원장에 선출, 군권을 완전 장악했다.

정치지도자로서 김정일의 특징을 들면 우선 군중을 발동하는 운동정과
속도전방식을 위주로 하며 혁명 1세대에 비해 정력적으로 일한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점이라 할 수 있다.

현장지도방문활도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라는 것에서도 이같은 그의 특징은
잘 읽을 수 있다.

그는 유난히 선전부문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꼽힌다.

70년대초 "피바다" "한 자위대원의 운명" "꽃파는 처녀"등 중요한 영화
가극제작을 지도했고 그의 저서 "영화예술론"은 문예 예술활동의 지침서로
꼽히고 있기도 하다.

북한은 수령과 당,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수령의 사상과 의지를 관철시키는 활동을 당이 하고 그 전위를 군이
맡는다고 할 때 당과 군을 장악한 김정일은 일단 수령이 될 준비를 끝냈다고
보는 분석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