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추경이란 이름의 '돈풀기병(病)'
추가경정예산이 또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연초 정치권에서 제기했다가 ‘성급하다’는 비판에 수면 아래로 내려간 추경론이 역대급 세수 펑크와 전기요금 인상 등을 계기로 다시 불거지고 있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30일 “1년간 전기요금이 40% 가까이 올랐다”며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에너지 추경’을 정부에 요구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이달 2일 ‘경제 살리기 추경’을 꺼냈다. 이 대표는 1월 초 신년 기자회견 때부터 코로나 부채 이자 감면 등을 명목으로 ‘30조 추경’을 주장했다. 올해 예산 집행이 시작되자마자 예산을 다시 짜자고 한 것이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추경에 선을 긋고 있지만 일부 의원은 추경에 우호적이다. 조경태 국민의힘 의원은 연초 전 국민에게 3개월간 매달 10만원씩 난방비를 주자며 ‘난방비 추경론’을 제기했다.

진짜 필요한 경우라면 추경을 못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정치권의 추경 요구는 대부분 법적 근거가 빈약하다. 국가재정법 89조는 추경 편성 요건을 ‘전쟁, 대규모 재해, 경기 침체, 대량실업, 남북관계 변화, 경제 협력 같은 중대한 대내외 여건 변화와 법령에 따라 국가가 지급해야 하는 지출 발생·증가’로 제한하고 있다. 지금 상황이 여기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과거 정치권과 정부는 추경을 연례행사처럼 남발했다. 꼭 필요한 예산은 본예산을 짤 때 집어넣고 추경은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자제하는 게 재정의 ABC인데, 잘 지키지 않았다.

툭하면 추경부터 꺼낼 게 아니라 낭비되는 예산부터 줄이는 게 재정의 정석이다. 안 그래도 줄줄 새는 나랏돈이 너무 많다. 얼마 전 감사원 감사 결과, 지난 3년간 전국 교육청에서 안 써도 되는 데 더 쓴 돈이 42조6000억원에 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례로 강원교육청은 학교 건물 도색비로 83억원만 필요한데도 333억원을 나눠줬다. 수요 조사 없이 교직원용 스마트 단말기 600대를 구입했다가 210대는 사용도 못 한 채 보관하고 있었다. 학생 수는 줄어드는데 내국세의 20%가량이 자동으로 교육청에 들어오니 돈을 펑펑 쓰는 것이다. 국비 3000억원을 투입해 2007년 개항한 전남 무안공항은 이용객이 적어 거의 개점휴업 상태다. 국비 3500억원이 들어간 강원 양양공항도 최근 유일 노선인 양양~제주노선이 끊기면서 운영이 중단됐다. 이런 사례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은 세수 감소를 이유로 추경을 하기보다 불필요한 지출부터 줄이는 게 먼저다.

나랏빚도 심각하다. 추경을 하려면 국채를 더 찍어야 하는데, 그러면 빚이 늘 수밖에 없다. 국가채무는 이미 1000조원을 넘었다. 윤석열 정부는 현재 50%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임기 중 50%대 초반에서 관리하겠다고 했는데, 지출 통제가 안 되면 빈말이 될 수 있다.

‘돈풀기 추경’은 물가를 자극할 수도 있다. 국민의 고금리 고통을 대가로 간신히 잡고 있는 인플레이션이 다시 깨어날 수 있다. 게다가 지금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빠른 저출산·고령화를 겪고 있다. 경제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잠재성장률 하락 압력도 커지고 있다. 정부 정책도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하는 ‘모르핀 투여’가 아니라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한 노동·연금·교육개혁 등 구조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얼마 전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는 이미 장기 저성장 구조에 와 있다”며 “그걸 재정·통화정책 등 단기정책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나라가 망가지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특히 정치권이 되새겨봐야 할 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