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HM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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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시작은 생각지 않은 곳에서 시작됐다. 2018년 중순 들어 산업은행에 인사상 큰 변화가 있었고 정용석 부행장이 갑자기 퇴임한 것이었다. 이전 연재분에서 언급한 대로 대기업 구조조정의 전문가로 경험이 풍부했던 정 부행장은 현대상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잘 이해했다. 초대형선 건조가 경쟁력 회복, 나아가 수익 개선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에 공감하며 적극적인 후원자 역할을 해줬다.

그런 후원이 있었기에 나는 2017년 중국 심천 ‘TPM(Trans-Pacific Maritime)’에서 재건을 위한 선전포고를 하고, 후속 작업으로 2020년 초대형선 투입을 위한 발주 준비와 영업 증대 작업 등도 활발히 펼칠 수 있었다. 아울러 얼라이언스 문제를 선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유럽을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때문에 정 부행장의 퇴임은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게다가 그 무렵 산업은행 분위기가 180도 바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2016년 현대상선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는 어떻게 해서든 해운을 재건하자는 분위기였고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나는 인천항만공사 사장으로 임기를 1년 남겨둔 시점이었지만 미완의 미션(mission)이 있었기에 흔쾌히 현대상선으로 복귀했다.

2018년 3월 말 현대상선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로 3년 연임됐을 때만 해도 분위기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반기 들어 나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반응은 산업은행뿐 아니라 당시 새로 발족한 해양진흥공사에서도 포착됐다. 산업은행은 현대상선, 나아가 해운업 전반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봤고, 해양진흥공사도 초대형선 건조를 재고하고 싶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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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는 못하나 산업은행의 새로운 경영진이나 해양진흥공사가 나를 보수 정부에 속한 사람으로 분류한 것 아닌가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연임을 승인하고 6개월도 채 안 돼 그만두라고 할 이유가 마땅히 없다.

당시 언론에 잠시 오르내렸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운운에도 동의할 수 없다. 극히 일부 그런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대다수 현대상선 직원들은 각자 자기 분야에 자부심 강한 전문가들이었다. 단지 오랜 침체로 위축되어 있었을 뿐, 여러 외국 주재원 경험을 통해 성장한 국제적 감각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2020년 이후 새로운 선복(적화공간)으로 재무장한 HMM이 업계 수익률 1위 내지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앞으로 불황이 깊어진다 해도 HMM의 원가상 경쟁력 우위는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수익 구조가 탄탄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산업은행이나 해양진흥공사는 안타깝게도 우리의 예측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컨설팅 회사까지 의뢰사 입맛에 맞춰 자료를 내놓기 일쑤였다.

2M의 집요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초대형선을 추진해왔는데, 주위에서 도와주던 조력자의 지원 열기가 식어가는 상황 변화가 자못 당황스러웠다. 다만 당시 초대형선 신조작업이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진행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주변의 부정적 기류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는 2020년에 초점을 맞춰 영업 증대, 발주, 얼라이언스 이 3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2018년 상반기 소형 선박으로 새로 개설한 극동-유럽 항로(AEX 항로) 덕분에 주당 선적량이 계획대로 6000TEU에서 1만TEU를 넘어섰으며 그해 9월28일엔 드디어 조선 3사와 건조 계약서에 서명해 초대형선 발주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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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은행에서 사장님 물러났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건조 계약서 서명 직전인 9월25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박스 클럽 회의에 참석 후 주최 선사인 CMA-CGM과 터미널 협력을 포함한 얼라이언스 협력 가능성을 타진하고 오는 길에 본사 중역으로부터 이 같은 전화가 걸려왔다.

2018년 3월 말 이사회에서 3년 연임을 결의한 지 6개월도 안 된 시점이자 2020년을 위한 준비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는 때에 갑작스러운 퇴임 통보를 받고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퇴임해야 하는 이유도 불분명하지만, 왜 내게 직접 의사를 전하지 못하고 직원을 통해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로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직접 가서 따져 묻기도 구차했다. 마음속으로 ‘2020년을 대비한 세 가지 미션 중 두 가지가 마무리됐으니 남은 기간 마지막 해야 할 얼라이언스 문제를 매듭짓는 데 총력을 기울이자’고 마음을 추슬렀다. 2019년 3월 말 퇴임하는 날까지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했다.

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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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었으니 만족한다. 당시 일들을 돌이켜보면 아쉬운 일이 많지만, 최근 여러 후배들로부터 초대형선으로 현대상선㈜(현 HMM) 회생에 힘써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 어려웠던 시절 헛고생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HMM의 사내유보금은 15조원 이상이며 연 이자만 5000억원 이상이라고 한다. 2016년 9월 한진 사태가 발발할 무렵 표류하던 현대상선에 승선해 사태를 수습한 후 2017년 10월17일 중국 심천에서 초대형선으로 승부하겠다고 선언한 지 5년여 만에 주어졌던 임무를 완수한 셈이라 큰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다.

더욱이 고심 끝에 신조 27척(초대형선 20척, 대형 유조선 5척, 1만2000TEU 급 2척)은 물론, 기존 선단 중에도 설치할 가치가 있는 선박에 설치한 스크러버도 이미 비용을 회수했다. 그간 예상한 것 이상으로 저·고황유 가격 차가 난 데다 지금도 평균 200달러 이상의 가격 차로 연간 수천억원의 비용 경쟁력에 이바지하고 있는 점은 생각만 해도 엔돌핀이 몸 안에 가득하다.

현대상선과 나아가 한국해운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순간 컨테이너 초대형선과 대형 유조선 신조에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정용석 전 산업은행 부행장님에게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또한 박세용 회장님을 비롯해 내게 가르침을 주셨고 훌륭한 기업문화를 남긴 선배님들,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의 시간에도 묵묵히 최선을 다해줬던 해상·육상·해외 동료, 후배들에게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 [대한민국 해운강국의 길 - 유창근 전 HMM 대표 육필 회고] 11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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