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우 흩뿌릴 제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 계랑(桂娘, 1573~1610) : 조선 시대 여성 시인. 호는 매창(梅窓). 기생으로 시와 노래, 거문고에 능해 황진이와 비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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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둘의 사랑은 뜨거워지고…
조선판 '전쟁과 사랑' 이야기

이 시조는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겠죠? 하지만 이 작품이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사연을 속속들이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볼까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어느 봄날, 전라북도 부안 사또가 한양에서 온 친구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습니다. 그 자리에 훗날 조선 3대 여성 문인으로 불릴 부안 기생 계랑(桂娘)도 참석했지요.

계랑은 오늘 잔치의 초대 손님이 당대 최고의 위항시인(서얼·천민 출신으로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한 시인)이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녀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고 이렇게 물었죠.
“그 유명한 유(劉)와 백(白) 두 사람 중 누구입니까?” 당시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 유희경과 백대웅이라고 들었는데, 그중에서 당신은 누구시냐고 물어본 거죠.

남자는 말없이 유(柳자)가 수 놓인 도포 자락을 들어 자신을 밝혔습니다. 서자 출신으로 예학의 최고봉이자 대시인이 된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이었죠. 그와 서녀 출신 기생 계랑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계랑이 절을 올리고 잔에 술을 따르자 유희경이 시 한 수로 응대합니다.

‘나에게 신기로운 선약이 있어/ 찡그린 얼굴까지 펼 수 있으니/ 금낭 속에 간직한 보배로운 그 약/ 정다운 그대에게 아낌없이 주리라.’

시인의 음률에 계랑이 거문고를 타며 화답하지요.

‘내게는 옛날의 거문고 있어/ 한번 타면 온갖 시름이 다 생긴다오/ 세상 사람 이 곡을 못 알아주니/ 그 님의 피리에나 맞추어보리.’

예학에 몰두하느라 마흔 중반까지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유희경이 풍류의 참맛을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꽃다운 십대 후반의 계랑으로서도 한 차원 높은 시적 성취를 맛보는 자리였지요.

유희경의 풍류는 여느 사람과 달랐습니다. 술에 취해 집적거리는 뭇 남정네에 비해 그에게는 인간적인 매력이 풍겼지요. 깊숙한 교감이 이루어진 그날 밤 이후 둘의 사랑은 시와 거문고와 노래를 타고 뜨거워졌습니다. 계절이 바뀔수록 정은 더욱 도타워졌죠.

그런데 임진년 4월 왜군이 쳐들어왔습니다. 불과 스무날 만에 한양이 점령되자 부안 관아의 아전들이 허둥대기 시작했고, 임금이 의주까지 몽진(蒙塵)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지요. 결국 안타까운 이별의 순간이 왔습니다.

계랑을 두고 떠난 유희경은 이별의 슬픔을 추스르며 도원수 권율 장군을 따라 서울로 달려갔고 곧 의병을 모아 적진을 누볐습니다.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육로의 패전 소식만 잇달아 전해졌지요.

어느새 가을이 깊었습니다. 애타게 그리는 사람은 전장에서 무사한지, 혼란 속에 소식이 없으니 가슴이 미어졌지요. 그때 계랑이 지은 시조가 바로 ‘이화우 흩뿌릴 제’입니다.

유희경을 만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진정을 주지 않았던 계랑,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던 유희경. 두 사람의 사랑은 기생과 서얼이라는 동병상련에 문학적 교감까지 곁들여져 애절함을 더했지요.

더욱이 고아함과 지조의 상징인 매화를 호에 쓸 정도로 절개를 중히 여긴 계랑이었으니, 인간적인 덕성을 늘 앞자리에 놓는 유희경에게 지극한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지난봄 ‘이화우(비 오듯 떨어지는 배꽃, 봄비) 흩뿌릴 제’ 눈물 아롱진 소매 끝을 잡고 이별한 임을 천리 밖 꿈속에서라도 오며 가며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라는 대목이 우리 가슴을 더욱 시리게 합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