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정부·민간실패가 합작한 금융위기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이 촉발한 금융위기 공포가 세계 금융시장을 흔들고 있다. 정책당국의 신속한 개입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어딘가에 잔불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금융시장을 움츠러들게 하고 있다.

은행 파산에서 구제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중요한 변곡점마다 정부 실패와 민간 실패가 반복됐다.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실패의 주요 과정을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 실패의 시발점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 제정된 도드프랭크법(Dodd-Frank Act)이 은행 감독을 대폭 강화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드프랭크법은 감독 대상 은행을 자산 규모 500억달러 이상으로 강화했으나 2018년 제정된 규제완화법이 이 기준을 2500억달러로 높였다. 실리콘밸리은행 같은 중견 지역은행이 미국 중앙은행(Fed)의 엄격한 감독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규제 완화를 위한 대의회 로비를 실리콘밸리은행이 주도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도드프랭크법 제정의 주역인 바니 프랭크 하원의원이 은퇴 후 실리콘밸리은행에 이어 파산한 시그니처은행 이사로 영입돼 규제 완화를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정부 실패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Fed의 초기 판단 착오와 뒤늦은 급격한 금리 인상이다. 뉴욕연방은행의 한 연구는 2021년 이후 미국 인플레이션 3분의 2 정도가 수요 압력에서 비롯됐고 수요 압력의 절반이 코로나19 위기 대응 과정에서 발생한 천문학적 재정적자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Fed가 수요 압력을 간과해 적기 대응이 늦어졌고 뒤늦게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금융 리스크가 확대된 모양새가 됐다. 은행 파산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Fed가 금리 인상에 따른 금융 리스크를 과소평가하고 은행 감독을 과신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두 번의 정부 실패는 실리콘밸리은행 자체의 금리·유동성 위험 관리 실패라는 민간 실패로 이어졌다. 기업대출은 자산의 30%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70%를 금리 변동에 민감한 장기국채에 투자한 것은 은행의 고유 업무라기보다 투자은행 업무에 가깝다. 크레디트스위스은행의 몰락도 위험이 높은 투자은행 업무에 과도하게 치중한 것이 근본 원인이다. 실리콘밸리은행의 부채 구조도 예금보호 대상이 아닌 고액예금이 95%를 차지할 정도로 뱅크런에 매우 취약한 구조였다. 더 한심한 것은 은행이 파산하기 전에 최고위험관리자(CRO) 직책이 6개월 이상 공석이었다는 점이다.

정부 실패는 두 번에서 멈추지 않았다. Fed의 감독 담당자들은 실리콘밸리은행의 문제점을 2021년 이미 파악했다. 특히 은행의 금리·유동성 위험 분석모델이 현실과 괴리돼 있어 데이터에 기반한 적정 위험관리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파악하고 은행 경영진에게 긴급을 요하는 사안으로 시정할 것을 통보한 게 2021년 10월이었다. 그럼에도 Fed는 특별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하지 않았고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2024년에 하는 것으로 안이하게 대처하는 실책을 범했다. 결국 올해 3월 은행이 파산하기까지 17개월이 지나도록 시정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 실패가 멈춘 것은 실리콘밸리은행이 파산하고 난 뒤였다. 금융 안정에 책임이 있는 최고 정책결정자들이 모여 사태를 판단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대형 금융위기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200억달러로 추산되는 은행 구제 비용과 감독당국의 신뢰도 손상은 피할 수 없었다.

미국의 사례는 법규정 미비뿐 아니라 정책당국자의 안이한 태도나 판단착오 같은 ‘휴먼 에러’가 정부 실패의 원인일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전문 인력에 대한 투자와 사회적 존중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훈이다. 은행 파산 사태와 관련된 미 상원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은 날카롭지만 정중했고 고위당국자의 답변은 상세하면서도 솔직했다. 실수는 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진지함으로 가득 찬 청문회였다. 과연 여의도에서는 그런 청문회를 볼 수 있을까. 연목구어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