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정순신 사태가 '더 글로리'와 달랐던 한 가지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면서 가슴 아팠던 장면 중 하나는 문동은이 담임에게 자퇴사유서를 내는 장면이었다. 자퇴 이유에 ‘학교 폭력’이라고 적은 동은에게 담임은 “사지 멀쩡하게 돌아다니는데 뭐가 폭력이냐”고 따져 묻는다. 연진의 뜨거운 고데기보다 담임의 차가운 경멸과 회피가 학폭으로 무너진 동은을 끝내 나락으로 빠뜨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얼마 전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의 학폭 문제로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 지명 하루 만에 낙마한 사태에서 학교의 대처와 교사의 진술이 눈길을 끈 건 이런 이유였다. 학교는 드라마와 달리 ‘어마어마한’ 직업(정순신은 당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인권감독관)인 학부모의 눈치를 ‘알아서’ 보지 않았다. 되레 정순신 부부에게 10시간의 학부모 특별교육을 명했다.

[토요칼럼] 정순신 사태가 '더 글로리'와 달랐던 한 가지
교사는 징계를 결정하는 회의에서 정순신의 아들에 대해 “반성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정순신 내외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피하지 않았다. 교사는 “정씨 부모가 책임을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해 2차 진술서는 부모가 전부 코치해서 썼다”며 “우리가 조금이라도 선도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분명히 했다.

평범한 예비 학부모로서 학교와 교사의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에 새삼 놀랐다. 교육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이 퍼져 있는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교육기관과 교육자가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까지 했다. 어렵지 않게 어떤 학교인지 찾을 수 있었는데 설립이념에 걸맞은 곳이었다. 이런 학교가 지난 정부에서 폐교 위기까지 몰렸던 일도 떠올랐다.

자식이 아무나 가기 힘든 명문 사학에서 강제 전학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면 냉정함을 유지할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내 자식이 한 인간의 인생에 어떤 참혹한 상처를 줬는지 헤아리기보다 내 자식의 인생에 작은 상처라도 남지 않길 바라는 건 부모라면 이해할 여지가 있다. ‘더 글로리’를 쓴 김은숙 작가는 “엄마는 내가 누굴 죽도록 때리면 더 가슴이 아플 것 같아? 아니면 내가 죽도록 맞고 오면 더 가슴이 아플 것 같아?”라는 딸의 질문을 받고 드라마를 구상했다고 했다. 작가는 딸의 질문이 “지옥 같았다”고 했다. 내 자식이 학폭의 피해자인 것도 고통이지만, 가해자라면 생각만 해도 지옥이다. 드라마 속 가해자들처럼 반성은커녕 후회조차 안 한다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정순신 낙마 이후 정치권에서는 ‘정순신 방지법’ ‘정순신 아들 방지법’과 같은 이름을 붙인 법안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학폭 가해자는 대입과 취업에서 불이익을 주고, 고위공직자 임명 시 자녀의 학폭 전력도 조회하는 내용이다. 필요한 조치가 이제라도 이뤄진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는 식의 안도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엔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조차 받지 못한 채 학폭의 그늘에서 괴로워하며 숨죽이고 있는 어린 학생들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정순신 사태가 드라마보다 덜 비극적인 건 ‘바른 교육’ 덕분이었단 걸 기억하고 싶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학생과 자식을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키울 의무를 저버린 부모를 끝까지 가르치려고 했던 학교와 교사가 있었다. 교육이 바로 섰기 때문에 ‘배우자, 직계존비속이 관계된 소송이 있느냐’는 공직 예비후보자 사전질문서에 “없다”라고 주저 없이 거짓말하는 사람이 경찰 고위직에 오르는 드라마 같은 일은 우리 사회에서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정순신이 아들에게 인간적 도리를 가르치는 대신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을 때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자는 인생의 클라이맥스에서 수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정순신의 ‘살신성인’에 자식을 바로 가르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아이가 큰 잘못을 저지른다면 부모로서 함께 책임을 지겠다. 이것이 ‘더 글로리’가 은유한, 우리 아이들을 학폭으로부터 보호하는 가장 강하고 올바른 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금도 부모의 직업이나 집안 배경에 상관없이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학생을 엄히 가르치고 있을 학교와 선생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