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여성과학기술인 후배들에게…
“다 좋은데 여자라서….” 34년 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대학교수직에 지원했을 때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여성이 과학기술인으로 살아가기에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이었다. 가까스로 교수가 된 후 그 누구보다 열심히 강의와 연구에 집중했다. 여성을 뽑아 놓았더니 제대로 못 하더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딸의 육아까지 병행하는 상황이라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이런 나의 시야를 틔워준 이는 우리나라 대표 여성 과학자인 나도선 교수였다. 2001년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 창립에 힘을 보태면서 공공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값진 경험을 통해 배웠다. 그 후로 나는 과학기술계 여성의 위상과 저변을 넓히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돌아보면, 내 커리어의 중요한 시점마다 선배 여성 과학자분들이 곁에 계셨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에서는 만 45세 이하 여성 과학자들로 구성된 차세대위원회를 운영 중이다. 이렇게 젊은 과학자들과 만날 때면, 육아를 병행하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그맘때 내 모습이 겹쳐 애틋하다. 한 차세대 위원이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나와 그들이 처한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 아기 낳기 전날까지 실험했고 출산 후 3주 만에 실험실로 복귀했으며, 밤낮없이 주말도 없이 치열하게 아등바등 일했던 내 얘기는 더 이상 본보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진가를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다만, ‘여성이라는 이유’가 거기에 얹어지진 않으면 좋겠다. 내 후배들은 오로지 능력만으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과학자로서의 꿈을 맘껏 펼치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 15일 ‘한국 여성 과학자의 노벨상 수상은 요원한가’를 주제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탁토론회가 열렸다. 여성 과학자가 남성 과학자보다 과소평가되는 ‘마틸다 현상’을 해소하려면, 젠더 편견을 개선하고 여성 롤모델과 네트워크 지원이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노벨상 연구 성과 대부분이 35세 이전부터 시작됐음을 볼 때 임신, 출산, 육아기 신진 여성 과학자들에 대한 지원은 반드시 필요하다. ‘성공에 대한 매튜효과의 양적-실증적 입증’ 논문에 따르면, ‘조기에 많은 지원과 기회가 주어질 경우 좋은 성과를 내는 블루칩 투자효과가 적용된다’고 한다. 유망한 신진 여성 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과감하게 투자한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 분야 노벨상을 여성이 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