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우정
누가 봐도 그야말로 완벽한 친구가 있었다. 학업과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온화한 품성이며 행동 하나하나의 기품이 얼마나 우아하고 세련되던지. 어떤 향기랄까, 그런 것이 늘 풍겼으며 그래서 그런지 그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항상 넘쳐났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와 그렇게 소위 깊은 우정을 나누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했던 인연의 끈마저 놓쳐버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의 성향과는 여러 면에서 거리가 좀 있는 다른 한 친구에게 나는 더 마음이 갔다. 객관적 잣대로 보자면, 그리고 친구를 사귀는 것에 관한 옛 성현들의 온갖 말씀을 참작해보자면, 분명 나는 실리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투박하고 말 없는 친구로 인해 평생을 행복하고 든든했다. 적잖이 성공을 거둔 그 친구는 늘 변함없이 나를 지지해줬고, 무엇보다도 내게 간절한 축복의 염원과 진심 어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제서야 나는 우정이라는 것이 단지 정확한 판단과 냉철한 이성만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오랜 세월을 거쳐 비로소 도달한 듯하다. 참으로 다행이고 행복한 것은 이런 나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24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효용성(utility)과 즐거움(pleasure)을 목적으로 하는 우정에 한참 앞서 선(goodness)으로 이어진 관계에 대해 힘줘 말했다. 친구란 “두 개의 몸에 사는 하나의 영혼(a single soul dwelling in two bodies)”이라고 했던가. 그 노련한 철학자는 나만 한 것 같은 고민을 그리 오래도 전에 사뿐히 정리했다.

그렇다. 나와 내 친구 사이에는 나도 모르는 나의 영혼 깊은 곳에서 그 친구도 모르는 그의 영혼 깊은 곳으로 서로 이어진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고백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쑥스러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가 이 글을 보게 될 그 친구에게 이렇게라도 청년과 젊음과 중년을 함께 지낸 남자끼리의 억센 연줄을 한 번쯤은 드러내고 싶다.

친구는 투박한 게 아니라 나를 섬긴 것이었다. 친구는 말이 없던 게 아니라 끝도 없이 나를 들어준 것이었다. 일평생 배움이 되어 나 역시 어느새 섬기고 듣는 노력의 문턱에는 도달했으니, 이 정도면 아까 그 철학자의 선에 더해 효용성과 즐거움도 다 얻은 것이 아닌가. 탓하지 말자. 사람의 향기란 찾으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