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반도체, 최후의 승자 게임만 남았다
삼성은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를 원하는가. 반도체 경기가 다운사이클(장기 하락) 국면에 접어들 때 단골로 나오는 외신 기사 제목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의 보고서에도 빠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세계 1위 기업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담겨 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북서부 에피로스의 국왕 피로스 1세는 로마를 침공해 연승을 거뒀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전투에서는 연이어 대승을 거뒀으나 그 역시 손실을 피할 수 없었다. 로마는 연패를 거듭했지만 즉각적인 충원으로 전쟁을 소모전으로 끌고 갔고, ‘알렉산더 대왕의 재림’이라고 불린 피로스를 고립시켜 패망으로 몰았다. 이후 피로스의 승리는 ‘승자의 저주’와 동의어가 됐다.

삼성의 반도체 전략을 피로스의 승리에 빗댄 것은 역설적으로 삼성의 존재감을 보여준다. 삼성의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는 시장을 폐허로 만들면서 싸운 결과다. 세계 최고의 기술과 원가 경쟁력,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물량 공세로 경쟁자를 파산으로 내몰고, 점유율 싸움에서 우위를 확보했다.

1997년 23개에 달하던 세계 D램 제조업체는 반도체 불황기를 거치며 절반 이하로 줄었다. 실상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과점체제다. 이들 3곳의 시장점유율이 95%에 달한다. 이 중 삼성전자의 ‘파이’가 41%로 가장 크다. 불황기를 활용해 경쟁자를 무너뜨리며 승자독식 체제를 굳힌 것이다. 반도체업계에선 이를 ‘대학살’로 부른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달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 연간 50조원이 넘는 투자 규모를 올해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기존 전략을 고수하겠다는 뜻으로 감산과 투자 축소를 기대했던 업계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같은 결정은 단기적으론 삼성전자에도 엄청난 부담이다. 피로스가 매 전투에서 로마에 괴멸적 타격을 안겼지만 본인 역시 적지 않은 사상자 피해를 본 것과 같다. 올 1분기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에서만 4조원이 넘는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혹한기라는 시장 추세를 거스르는 대가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마이크론과 인텔 등이 주도한 ‘D램 카르텔’에 칼을 빼 들었다고 분석했다.

초점은 이번에도 이재용 회장의 승부수가 통할 것인가에 쏠리고 있다. 시장은 반신반의하고 있다. 달라진 시장 환경과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변수가 더해진 것이다. 대만 TSMC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참전과 미·중 갈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 복잡한 삼각함수를 풀어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삼성의 실패는 개별 기업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의 1차 외환 방어막은 수출이고, 그중 반도체가 20%가량을 책임졌다. 지난 1월에는 그 비중이 13%로 떨어졌다. 금액 기준으로는 60억달러로 1년 전 108억달러에서 거의 반타작 수준으로 줄었다. 올 들어 지난 20일까지 무역적자가 187억달러로 지난해 연간 적자의 40%에 육박한 데는 반도체 수출 급감이 한몫했다. ‘반도체 불황기=한국 경제의 위험 신호’라는 분석은 우리 경제의 본질을 보여준다.

확실한 건 지금은 삼성전자만의 전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피로스의 승리가 주는 교훈은 안정적인 보급선과 강력한 동맹 구축 없이는 필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제 D램 시장에선 최후의 승자 게임만 남았다. 고립무원 상태에선 승리할 수 없다. 지금은 총력전을 펼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