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탄핵 정치가 열어젖힌 대통령제의 위기
남미 민주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잦은 탄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페루에서는 대통령 탄핵 여파로 내전에 가까운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시위대와 경찰이 두 달간 충돌해 50여 명이 사망했다. 브라질, 에콰도르, 파라과이, 베네수엘라 등에서도 탄핵 사태는 잊을 만하면 터진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80년대 민주화 이후 83번이나 탄핵소추가 있었는데, 야당이 한 해에 두세 번은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았던 셈이다.

탄핵 제도의 목적은 대통령제의 결함을 보완하는 것이다. 대통령제에서는 원칙적으로 행정 수반의 임기가 무조건 보장된다. 국민이 직접 선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막강한 권한을 생각해보면 위험하다. 의원내각제에서는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들이 행정 수반을 뽑기 때문에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절차가 국회에 마련돼 있다. 이런 의원내각제 요소를 대통령제에 도입한 것이 탄핵 제도다. 하지만 제도의 안정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민이 행정 수반과 국회의원을 모두 직접 선출하기 때문이다. 탄핵이 오남용되면 대통령과 국회가 누가 국민의 진짜 대표인지를 두고 내전을 벌이게 된다.

정치학자들은 탄핵 오남용을 대통령제의 결함을 이용한 합법적 쿠데타라고 평가한다. 군부가 총칼로 하던 일을 국회가 탄핵 제도를 이용해 비슷하게 한다는 비판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와 국회 다당제가 공존하며 여소야대 상황이 일반화한 남미에서는 이런 합법적 쿠데타가 상대적으로 더 쉽다. 여러 정당이 지난하게 협상해야 하는 입법보다 대통령을 상대로 야당들이 탄핵 동맹을 맺는 게 수월하다. 행정 수반은 탄핵을 피하려면 야당에도 이권을 나눠줘야 한다. 정부가 약탈적 지대 동맹으로 변모한다. 당연히 경제도 온전할 리 없다. 남미의 잃어버린 40년이 이렇게 지속됐다.

한국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탄핵 정치라는 기름에 불을 붙였다. 민주당은 시도 때도 없이 촛불혁명의 영웅적 서사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소환한다. 올해는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물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라며 국회에서 ‘쪽수’로 밀어붙여 통과시켰다. 판례에 의하면 탄핵은 중대한 법 위반이 되느냐가 핵심 쟁점이다.

“시민이 안전하게 살 헌법상 권리를 침해한 만큼 이 장관을 헌재 심판대에 세우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다”고 말하는 진보 성향 지식인도 있다. 이런 논리라면 문재인 정부의 국토교통부 장관들도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헌법 조항을 위반한 것이니 탄핵당해야 마땅했다. 정부의 모든 정책은 헌법상의 기본권과 무관하지 않다.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대통령과 장관은 항상 탄핵감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논리다. 남미 민주주의의 타락을 그대로 따라가는 꼴이다.

민주당은 탄핵 정치라는 대통령제의 지옥문을 열었다. 이대로 가면 여야가 바뀔 때마다 보복적 탄핵소추가 이뤄질 것이다. 민주당의 성찰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국민의힘이 범국민적 신뢰를 얻을 것 같지도 않다. 최근 나오는 중대선거구제와 다당제 개혁론은 지금 같은 정치문화에서는 남미 같은 탄핵 동맹만 활성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차라리 이번 계기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고려해봄 직하다. 미국이란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면, 어쨌든 선진국의 정부 표준 모델은 의원내각제다. 선진국 진입을 앞두고 추락한 나라들 대부분이 대통령제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