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피리 부는 사내에게 휘둘리지 말자
새해 벽두에 브라질이 난자당했다. 새 대통령이 취임한 지 1주일 만이었다. 대통령궁, 연방의사당, 대법원, 국가의 요체가 시민들에게 점령당했다. 집무실이 불타고, 유리창이 깨지고, 국보급 예술품이 부서졌다. 시위대는 “대선을 도둑맞았다”고 부르짖었다.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보우소나루는 그들을 지지한다고 했다.

이 장면 어디선가 봤다. 2021년 1월 6일, 미국 워싱턴DC 의사당을 폭력으로 장악한 시위대가 환호하는 장면이 TV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들 판박이 장면에는 공통점이 있다. 지지하는 정치인을 위해 빼앗긴 권력을 폭력으로라도 찾아오겠다는 것이다. 일찍이 로크는 <통치론>에서 권력을 위임받은 자가 부정의를 저지른다면 주권자인 시민은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했다.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인민의 주권을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확증편향은 이성판단 실패 불러

브라질과 미국의 시위대는 저항권을 행사했다. 투표로 결정한 시민 정부에 불복했다. 투표가 부정의했다는 것을 이유로 제시했지만 두 나라에서 부정투표가 있었다는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항권은 정당했을까.

문제는 늘 ‘현상의 오독’에서 발단한다. 대부분 사람은 정의가 자기 가까이에 있다고 믿는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나는 평소 상대 운전자에게 예의를 지킨다’고 답한 사람이 85.4%였다. ‘요즘 도로 위에는 지킬 것을 지키지 않는 운전자가 너무 많다’고 응답한 사람도 72.2%에 달했다. 한마디로 나는 정의로운데 너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나의 옳음은 디케의 저울이 수평을 가리킨다고 믿고 상대방 저울은 기울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고선 상대가 확증 편향에 사로잡혔다고 공격하는 것이다.

정의가 이처럼 확증 편향의 자기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그 결과는 참혹하다. 브라질과 미국의 사례가 이를 증거한다. 민주주의의 실패요, 붕괴다. 이성의 시대가 저물었다지만 이건 아니다.

브라질 폭력 사태의 책임은 지지자를 선동한 보우소나루에게 있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내 생각만 옳다고 믿는 주권자의 오만한 알고리즘 때문이다. 시위대는 브라질 시민 50.9%의 선택을 짓밟았다.

현상 오독의 대가는 참혹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현상을 오독한다. 이 같은 사례는 차고 넘친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은 이재명 후보가 병사 봉급 200만원을 제시하자 포퓰리즘이라고 통박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석열 후보도 똑같은 공약을 내놓으며 돌변했다.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바뀐 것은 사람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다른가. 한치도 다름없다. 소위 개딸(개혁의 딸들)이라고 하는 이 대표 진성 지지자들은 그가 하는 말에 ‘묻지마 지지’를 보낸다.

이렇게 오독한 진리는 커다란 대가를 치른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방증한다. 러시아 인민은 개전 초기 83%가 푸틴을 지지했다.

이제 무(無)이성으로 건설한 자기 신념의 등대를 부숴야 한다. 5·18을 북한 인민군이 일으켰다고 하는, 천안함이 미군 잠수함에 부딪혀 침몰했다고 하는, 객관적인 사실조차 부정하고 오도하는 우상의 알고리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입에 발린 사탕을 건네는 자는 욕망의 나팔수다. 피리 부는 사나이다. 그 나팔 소리를, 피리 소리를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