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재개된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첫발부터 삐걱대는 모양새다. 정부가 예정보다 일정을 두 달 앞당겨 지난달 27일 5차 재정추계 시산(시험계산) 결과를 내놓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민간자문위원회에서 발목이 잡혔다. 24년째 그대로인 보험료율(9%)을 15%로 높이는 데는 합의가 이뤄졌으나, 그대로 받을지 아니면 더 받을지를 놓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연금개혁 논의를 콩 구워 먹듯 처리할 일은 아니다. 기금 재정 상황과 경제성장률, 출산율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감내 가능한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가입·수급연령 조정 등을 꼼꼼히 계산해 합의를 도출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 5년간 무책임하게 개혁을 방기한 탓에 기금 소진 시기는 2년, 적자 발생 시기는 1년이나 앞당겨진 게 현실이다. 결론을 늦추면 늦출수록 연금 고갈로 인한 후폭풍은 감당 불가능하게 커질 게 뻔하다. 더구나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더 내고 덜 받거나, 늦게까지 내고 그대로 받는 식의 ‘현세대 희생적’ 개혁 외에 어떤 책임 있는 해법이 있을 수 있겠나. 그런데도 아직 민간자문위 회의 석상에서 “여소야대 상황인데 소득대체율 인상을 주장하는 양대 노총에 명분을 줘야 야당이 연금개혁에 나설 수 있을 것 아닌가”라는 따위의 주장이 나온다고 한다. 연금기금 고갈을 앞두고 청년층의 보험료 납부 거부, 금융시장 대혼란 등 아찔한 재난 상황이 코앞인데도 끝까지 노동조합 눈치나 보며 개혁을 모면하려는 무책임한 작태가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최근 프랑스의 결연한 연금개혁이 더 주목되는 이유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달 42개 업종별 연금제도를 통합하고 ‘그대로 내고 늦게 받는’ 내용의 연금개혁안을 발표했다. 첫 임기 중 코로나 사태로 어쩔 수 없이 중단해야 했던 개혁에 재선되자마자 다시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다. 그제는 100여만 명의 노조원이 두 번째 총파업에 나섰지만 “개혁안은 협상 불가”라고 선을 그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렇게 배수의 진을 치고 나선 배경엔 향후 10년간 200조원에 달할 천문학적 연금적자 문제도 있지만, 연금개혁이 국가 안보와 직결돼 있다는 판단 때문이라는 게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분석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더 불확실해진 국제 정세 속에서 첨단 무기와 사이버 전쟁 능력 확보 등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고, 이 같은 국방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세대의 연금개혁 양보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금을 걷어 연금 지급으로 다 써버리면 나라는 어떻게 지키느냐는 위기의식의 발로다. 프랑스의 이런 절박한 결단이 한국과 무관하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