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독서 모임을 준비할 때마다 고민이 앞선다. 이맘때 읽기에 알맞은 책은 뭘까. 계절별로 읽기 좋은 책이 따로 있기는 할까. 굳이 함께 모여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약 330년 전 청나라 장조(張潮)의 소품 잠언집 <유몽영(幽夢影)>에서 몇 가지 답을 발견했다. 장조가 첫머리에 제시한 지침부터 흥미롭다.

“경서(經書)를 읽기에는 겨울이 좋으니, 정신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를 읽기에는 여름이 좋으니, 날이 길기 때문이다. 제자서(諸子書)는 가을에 읽기 좋다. 운치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문집(文集)은 봄이 더 좋다. 기운이 화창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책"

다음 제언도 눈길을 끈다. 혼자 읽느냐 함께 읽느냐에 관한 얘기다. “(사서삼경 같은) 경전은 혼자 읽어야 좋고, (역사책인) <사기(史記)>와 <통감(通鑑)>은 벗과 함께 읽는 게 좋다.” 성현의 저술은 조용한 방 안에 홀로 앉아 정독하며 사색해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고, 역사서는 여럿이 함께 읽으며 토론하는 게 더 낫다는 얘기다.

‘나 홀로 정독’과 ‘다 함께 토론’의 장점을 접목한 사람 중에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이 있다. 그는 “뒤숭숭한 날에는 경전을 읽고, 차분한 날에는 사서를 읽는다”면서 마음이 고양된 날 경전으로 심신을 다독이고, 가라앉은 날 사서로 투지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이 같은 잠언은 수많은 독서와 깊이 있는 사색의 결실이다. 장조는 요즘으로 치면 교육감에 해당하는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15세부터 문명을 떨쳤다. 그러나 10년 이상 과거에 낙방했고, 평생 미관말직을 전전했다. 그는 이런 불운과 좌절을 오히려 지렛대 삼아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220여 권에 이르는 총서까지 펴냈다.

그의 역작 <유몽영>은 청나라 쇠퇴와 함께 잊혔다가 20세기 초중반에 다시 빛을 봤다. <생활의 발견>으로 유명한 린위탕(林語堂·임어당)은 이 책을 읽고 너무나 감격해 영어로 서구에 소개하면서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책”이라고 극찬했다.

<유몽영>에는 책에 관한 얘기가 유난히 많다. 비운의 문사였던 장조가 책을 스승으로 삼은 덕분이다. 그는 “독서야말로 가장 즐거운 일이긴 하지만, 사서를 읽으면 즐거움은 적고 노여움이 많아지는데 따져보면 노여움을 안기는 것 또한 즐거움을 안기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지난 역사의 흥망성쇠에서 삶의 비의(秘義)를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일본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춘추좌전>을 13번 읽고, 중국의 마오쩌둥이 <자치통감>을 17번이나 읽은 이유도 이와 같다.

<유몽영>에는 서양의 아포리즘(aphorism·금언, 격언)이나 에피그램(epigram·경구, 풍자시) 같은 문장도 많다. 빛과 그림자의 양면을 고찰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장조는 “거울과 물속의 그림자는 빛을 받아들인 결과이고, 햇빛과 등불로 만든 그림자는 빛을 베푼 결과”라면서 “하늘의 달도 햇빛을 반사해 그림자를 만드는데, 천공에서 만들어지는 달의 그림자는 햇빛을 받아들인 결과이고 밤에 만들어지는 그림자는 달이 햇빛을 받아 땅에 베푼 결과”라고 설명한다.

비바람이 꽃을 강하게 만든다

빛을 반사하는 대상인 거울과 빛을 베푸는 광원(光源)인 달을 대비하면서 그가 달을 사랑하는 까닭 역시 “빛을 받기도 하고 베풀 줄도 알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또 “거울은 스스로를 비추지 못하고, 저울은 스스로를 달지 못하고, 칼은 스스로를 찌를 수 없다”는 경구와 함께 거울을 대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풍자하기도 한다. “추한 용모와 더러운 성깔을 지닌 자가 거울과 원수 되지 않는 것은 거울이 지각없는 사물(死物)이기 때문이다. 만일 거울에 지각이 있다면 반드시 박살이 났을 것이다.”

가슴을 아릿하게 하는 구절도 있다. 말로는 그럴듯한데 실제로는 쓸쓸한 삶의 단면들을 묘사한 대목이다. “경치 중에 말로 할 때는 아주 그윽하지만 실상은 쓸쓸한 게 있는데 이슬비가 그렇다. 말로는 우아하지만 실로 견디기 힘든 경우도 있는데 가난과 병이 그렇다. 소리 가운데 말로는 아주 운치 있지만 실제론 거칠고 비루한 것이 있는데 꽃 파는 소리(賣花聲)가 그렇다.”

이처럼 빛나는 문장과 그 뒷면의 그늘을 함께 비추는 게 <유몽영>이다. 이 책에 매료된 인물 가운데 특별한 이가 있었다. 청나라 말기 지방 현감을 지내다 아깝게 생을 마감한 주석수(朱錫綏)다. 그는 속편 격인 <유몽속영>에서 “비바람은 꽃을 아껴 그칠 줄 모르고 환난 역시 재주를 아껴 그칠 줄 모른다”며 역경은 곧 성공의 디딤돌이라는 이치를 일깨웠다.

이런 교훈은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에 <춘추>를 지었고, 굴원이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기에 <이소>를 썼으며,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당한 뒤에 <사기>를 저술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유능한 개혁가들은 모두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며 “뛰어난 자질로 이런 어려움을 차례로 극복하고 정상에 오른 뒤 시기하는 자들을 제거하면 이후 더욱 강력하고 안정된 기반 위에 명성과 번역을 누릴 수 있다”고 설파한 것과도 상통한다.

짧은 말로 긴 울림을 주는 잠언

모든 잠언과 경구는 오랜 자기 성찰 과정에서 완성된다. 남다른 생각 끝에 체득한 진리를 압축적으로 기록했기에 가장 짧은 말로 가장 긴 울림을 주는 묘미까지 갖췄다. 난세를 헤쳐갈 묘안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수불석권(手不釋卷)의 지혜와 홀로 방 안에 앉아 자신을 돌아보는 정좌(靜坐)의 고요에서 나온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렵고 국제 정세가 위태로울 때는 더 그렇다.

지금은 겨울이니 정신을 집중하고 경전을 읽는 게 좋겠다. 다가올 계절을 기다리며 문학과 역사서도 준비해야겠다. 머잖아 얼음이 풀리고 봄 싹이 돋는 소리가 들릴 즈음, 우리 내면에 가려져 있던 ‘그윽한(幽) 꿈(夢)의 그림자(影)’를 만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