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국가가 新산업 주도할 때다
이달 초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미국경제학회에 참석했다. 수많은 세션 중 경제 성장을 다루는 세션이 만원사례를 이뤘다는 것은 의외였다. 경제성장론에 관한 새로운 학문적 발견이 없기 때문이다. 미·중 대격돌의 지정학적 충돌 시기, 눈앞의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는 미국의 지속적인 금리 인상과 우려되는 장기 경기 침체라는 불확실성 속으로 들어가는 향후 경제의 궤적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경제이론이 제시하는 경제 성장의 요체는 투입량과 생산성이다. 한국은 생산요소의 급속한 투입 증가와 축적으로 20세기 후반 고도 성장의 신화를 써 내려갔다. 1997년 외환위기 극복과 선진 경제로의 전환을 주도한 것은 생산성이다. 생산성의 궤적을 좌우하는 두 가지 요소는 제도와 정책이다. 경제주체의 연구개발 인센티브를 자극하는 지식재산권, 분쟁의 공정한 해결을 기대할 수 있는 법치가 제도의 근간이라면, 경쟁 촉진과 사회안전망 구축은 정책의 영역이다.

정책의 영역에는 영원불멸의 진리는 없다. 항상 시간의 검증에 맞서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보조금이다. 1990년대 초반 동서 냉전이 종식되고, 국가와 체제를 가리지 않는 세계화가 시작됐을 때 보조금은 ‘나쁜’ 정책이었다. 경제주체의 자립 의지를 손상시키고, 비효율적인 분야에 희소 자원을 투입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선진국도 한때는 보조금에 의지해 자국 산업을 키웠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한다면 ‘사다리 걷어차기’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다분히 ‘내로남불’인 논지임에도 거대한 세계시장의 분업구조에 편입돼서 성장 궤적을 시작할 수 있다는 유혹이 보조금에 대한 근시안적인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게 했다.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기구가 제대로 작동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지난 30년을 지배하던 ‘묻지마 세계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 변화의 바닥에는 미·중 패권 경쟁이 있다. 정치가 만든 환경 속에서 생산, 유통, 소비가 이뤄지는 것이 경제다. 환경 변화는 게임 룰의 변화를 의미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시작한 공급망 개편은 이제 더 이상 글로벌 공급망이 제품 기획에서 연구개발, 소재 확보, 조립, 생산, 유통의 마지막 단계까지 체제의 차이를 불문하고 이뤄지지는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산업과 안보에서의 핵심 요소인 반도체의 글로벌 공급망 개편이 신냉전의 새로운 단층선이다. 바야흐로 ‘경제안보’ 시대의 개막이다.

경제안보 시대는 안보 연관성이 높은 산업의 투자 결정 등 민감한 사안을 “기업이 알아서” 하도록 맡겨 두는 상황은 아니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산업생태계를 조성하고 유지하려 한다. 보조금이라는 당근으로 외국 기업을 유치하려는 노력은 미국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도 하고 유럽도 한다. 디지털 대변혁 시기 파운드리에 특화해서 전성기를 맞고 있는 대만의 TSMC를 유치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은 자국의 세금을 보조금으로 쏟아붓길 주저하지 않는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 일본 규슈 구마모토에 공장을 세우고 있다.

공급망 재편이라는 정책 목표는 선진국들의 국내 정치적 제약 여건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국내 세금으로 외국 기업 배불리기, 투입 비용 대비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은 비효율적 산업정책, 정부가 승자와 패자를 정하는 불공정 게임 등 고전적인 산업정책 비판론은 경제안보 시대에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다자무역체제의 보조금협정 위반이라는 문제 제기는 판을 뒤집지는 못한다. 다자무역체제의 기둥인 미국 유럽 일본이 앞장서서 보조금협정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정책이 나쁜 것이라는 대세론은 이제 과거지사다.

21세기 지정학적 대충돌의 단층선이 선명해지면서 다른 제조업 강국들은 신산업정책 속도전을 하는데 한국은 어디에 있는가. 단층선을 보지 않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설계도를 만들 역량이 부족한 것인가. 극단적인 정치적 분열상을 극복하지 않으면 한국의 전략적 공간은 점점 더 좁아져 갈 뿐이다. 뉴올리언스에서 한국은 2025년 세계경제학대회를 서울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해방 80주년을 맞이하는 2025년 여름 세계 경제학자들이 서울에 모였을 때, 학회장 안팎에서 한국의 경제 성장이 경제안보 시대의 성공 사례로 인용되고 회자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