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산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맞대응하기 위한 유럽연합(EU)의 보호무역주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EU는 역내에서 생산된 원자재를 사용한 제품에만 세금·보조금 혜택을 주는 핵심원자재법(CRMA) 초안을 곧 공개할 예정이다. 미국과 유럽의 ‘고래 싸움’에 한국만 등이 터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미국의 IRA는 무역 공정성을 해친다”며 대응을 시사했다. EU의 CRMA는 유럽산 광물 비율이 낮은 전기차 배터리 등에 추가 관세를 물리거나 보조금을 삭감하는 식으로 차별적 조항을 둘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판 IRA’인 셈이다. 중국 러시아 등에 대한 광물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 산업의 이탈을 막으려는 조치지만, IRA 때처럼 한국 업체들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EU가 공식화한 ‘탄소중립산업법’도 풍력 태양광 등 유럽 클린테크 산업에 보조금 등의 혜택을 주는 내용이어서 한국 기업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EU는 미국에 투자가 몰리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역내 반도체 생산 시설에 430억유로(약 58조원)를 지원하는 ‘EU 반도체법’도 마련했다. IRA 시행 이후 한국 배터리 업체들의 대미 투자에 가속도가 붙은 가운데 EU마저 ‘역내 생산 우대법’을 잇따라 들고나오면서 유럽에도 공장을 추가로 지어야 할 판이다.

날로 암울해지는 수출 전망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올 들어 20일까지 무역적자가 102억6000만달러로 지난해 전체 적자(474억달러)의 약 22%에 달했다. 주력 품목인 반도체 수출이 34.1%나 급감해 우려를 키우고 있다. 미·EU의 무역전쟁 조짐 속에 한국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마저 향후 10년간 연 3%대 저성장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 ‘수출 한국’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보호무역이라는 난기류를 헤쳐나가는 게 급선무다. 통상외교 역량을 극대화하고 시장 다각화 노력을 배가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법 발효 때까지 손 놓고 있었던 IRA 사례를 교훈 삼아 EU 집행부와 유럽 의회 동향을 면밀하게 모니터링하고 모든 채널을 가동해 한국에 불리한 쪽으로 입법이 이뤄지지 않도록 CRMA에 선제 대응해야 한다. ‘칩4’ 등 미국 주도의 첨단산업 공급망 재편에 적극 참여해 한국 기업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아세안, 인도, 중동 시장 개척에도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캐시 카우’로 떠오른 원전·방산 수출 등은 정부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민관이 원팀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팀코리아’ 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