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칠레에서 날아온 대북 규탄
칠레는 먼 나라다. 직항편은 없고 비행시간만 24시간 걸린다. ‘유럽의 형제국’이란 터키보다 훨씬 멀다. 그런 물리적 거리를 2004년 발효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좁혔다. 가성비 높은 칠레산 와인과 수산물이 국민 일상을 파고들며 친근감을 키웠다.

두 나라는 고도의 경제 발전과 선거를 통한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모범국가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 출발은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칠레 대통령의 집권 기간이 겹치는 1970년대부터였다. 피노체트는 박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산업 진흥책을 모델로 삼았다. 미국 유학 박사들로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을 설립한 박 대통령처럼 피노체트도 미국 시카고대에서 유학한 칠레 출신 경제학자들을 등용해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초석을 다졌다. 양국의 도로교통 규정, 신호등 체계 등이 비슷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칠레의 작년 1인당 국민소득(GDP)은 1만6500달러이며, 현재 남미에서 둘뿐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다.

최근 칠레 정치권은 급진좌파와 우파의 격돌, 작년 젊은 좌파 대통령 가브리엘 보리치(36)의 당선으로 남미 핑크타이드(좌파 물결)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그런 나라의 하원이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잇따른 도발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작년 칠레 총선에서 뽑힌 하원의원 155명 가운데 중도좌파 37명, 급진좌파가 42명이나 포진하고 있다. 쉽지 않은 대북 규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133명 참석에 132명 찬성이란 압도적 지지로 결의문을 의결했다. 이를 주도한 토마스 라고마르시노 의원은 “모두의 안정을 위협하는 상황에 방관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지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인류와 국제사회의 공동번영·안정을 해치는 행위엔 정파를 떠나 침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민주화 이후 중도좌파와 우파가 온건한 경쟁을 벌이며 안정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켜온 칠레 정치의 내공이 느껴진다. 한·칠레 수교 60주년을 맞이한 올해, 더욱 의미 깊은 칠레 의회의 결의문 채택이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