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악마적 애도와 야만의 시대
닐 조던 감독의 1992년 작 영화 ‘크라잉 게임’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전갈이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개구리에게 부탁했다. 개구리가 묻는다. “네 독침으로 찌르지 않는다고 어떻게 믿지?” 전갈이 대답한다. “널 죽이면 나도 익사할 텐데 내가 왜 그러겠어?”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한데, 강 중간에서 물살에 놀란 전갈이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렀다.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개구리가 전갈에게 묻는다. “왜 그랬어?” 전갈이 대답한다. “어쩔 수 없었어. 내 본성이라서.”

1988년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1남4녀 중 막내 외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스물다섯 살 의사였다. 천주교 신자인 선생은 아들의 장례 2주일 뒤인 9월 12일부터의 일기를 <생활성서>에 1990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연재한다. 이 기록은 한 어머니이자 인간이 지옥불의 고통 속에서 산 채로 재가 되며 남긴 영롱한 사리다. 세상이 싫고 하느님을 원망하다 못해 부정하고 싶어지는 것과 자신의 치부까지 어떻게 저리 다 내려놓을 수 있나 싶게 적고 있다.

“조문을 하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도덕입니다. 그러나 참척(慘慽)을 당한 어미에게 하는 조의는 그게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위로일지라도 모진 고문이요,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습니다.”

위로란 이렇듯 조마조마한 것이다. 선생은 딸들의 극진한 보살핌마저 뒤로하고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타인은 지옥이다.’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고로, 위로란 원리상으로는 불가능하다. 역설적이게도 이걸 인정하면 위로가 숨 쉴 바늘구멍이 생긴다. 말보다 침묵과 눈빛이 위로되기도 하는 까닭은 그래서이고, 나를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멀리서 기도하는 것도 애도가 기도의 부분집합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남들 보는 장소에서 나는 슬프다, 나는 정의롭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며 경멸했다. 골방에서 홀로 조용히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수녀원에서 선생은 병든 노인들의 똥오줌을 치우는 젊은 수녀의 미소와 요절한 수녀의 묘비 같은 것들에 위로받는다.

“하느님은 제아무리 독한 저주에도 애타는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고, 그리하여 저는 제 자신 속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러기 위해선 아무한테나 응석 부리고 싶은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요.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이 사회가 또다시 참척의 고통을 당했다. 정밀한 수사를 통해 법에 따라 처벌하고 개선해야 한다. 배상도 있기를 바란다. 다만, 일반대중은 요동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명하다. 자신의 슬픔과 선의가 다양하게 악용되고 약탈되는 걸 본 이들이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보다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런 ‘악마적 애도사기(哀悼詐欺)’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이 무너진 갱도에 갇힌 “광부가 적어도 한 명은 죽을 줄 알았는데, 둘 다 살아서 솔직히 아쉽네. 기회 물 건너감”이라고 야당 갤러리에 쓰는 자들보다 많아졌기 때문이다. ‘엄마’의 ‘허락 없이’ 아들딸의 혼령을 끌고 가서 시위하지 마라. 그 죄가 인신매매보다 덜 하지 않고, 그 엄마를 다시 지옥불에 던지는 일이니까. 좌파건 우파건 광장에서 사라져라. 이제 광장은 민주주의의 도살장이다. 우리는 전갈이 아니라 인간이다. 돕는 이를 찔러 죽이고 함께 죽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다. 재난이 닥치면 서로를 번갈아 등에 태우고 슬픔의 강을 건너가던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걸까? 그 해 그 봄 바다 이후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2011년 1월 22일 아들 곁으로 떠나셨다. 장례에 오는 가난한 문인들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미리 당부하셨다고 한다. 선생은 왜 일기를 공개했던 걸까? 자신의 고백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종교심이었으리라. 그러나 신부(Priest)가 살인을 주술(呪術) 하는 기도를 주도하고 독려하는 세상은 상상조차 못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실지로 그런 사회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 나는 이 시대를 혐오한다. 상처를 받았으나, 고통과 더불어 살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