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2022년 가을의 단상
가을의 상징은 들녘에 넘치는 누런 벼 이삭과 단풍잎의 다채로운 색감이 주는 풍요다. 그런데 짧아진 가을 때문에, 또 이런 일 저런 일로 정신 팔리다가 형형색색의 단풍과 유난히 파란 가을 하늘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스치듯 가을이 지나갈 것만 같다. 이맘때면 유독 어릴 적 생각이 나곤 한다.

필자는 아홉 살, 네 살 차이 나는 두 형님과 일곱 살 차이 나는 누이의 영향을 무척 많이 받고 컸다. 초등학생 시절 대학생인 누이한테 배워 알파벳을 다 떼고 중학교에 입학했고, 게다가 팝송을 즐겨 들은 큰형님 덕분에 1970년대를 풍미한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이란 가사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다녔다. 이것도 조기교육이라고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후 줄곧 영어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미국 유학까지 가게 됐으리라.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그해 가을에는 소위 운동권 대학생으로 도피 중이었던 둘째 형님 영향으로 필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법과대학에 진학하게 됐고 결국 로스쿨 교수가 됐다. 형제들 속에 자라면서 이것저것 배운 게 많고 영향을 받아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형제들 덕분에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별다른 가정교육을 하진 않으셨고 그저 내리 사랑해주셨던 기억이 깊어가는 가을밤에 더욱 선연하다.

요즘 세상살이가 각박해져 결혼을 안 하든지,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든지 하는 세태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1인 가구가 늘어나 24시간 편의점에는 1인 가구용 상품이 즐비하다. 형제 많은 집안에서 유형, 무형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란 필자는 새삼 가족의 소중함을 느낀다.

한국 최고법인 헌법이 ‘혼인과 가족생활’이라는 용어를 포함하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헌법 규정을 통해 결혼과 출산을 통한 가족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자칫 젊은 세대에게 꼰대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독일의 대표적 공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는 국민, 영토 및 주권을 국가 구성의 3대 요소로 강조했다. 그러니까 국민은 국가 성립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얘기다. 그런데 비혼 증가와 출산율 저하로 인구절벽 상황에 이르면 국가 존립이 흔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1970년대까지 서구사회에서 인구 증대에 기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동성애가 금지되기도 했던 걸 보면, 남녀 간 결혼과 출산을 통한 가족 구성이 국가 존립, 국력의 신장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할 법하다. 다행히 오는 토요일 혼례식 주례를 설 때 가족의 소중함을 자연스레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소슬한 바람에 왠지 모를 가을의 쓸쓸함이 느껴질 때, 소중한 가족의 추억을 만들어준 고마운 형제들에게 전화라도 한 번 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