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의 외화채권 조기상환 불이행(콜옵션 미행사) 결정에 따른 여진이 일파만파다. 한국 기업의 외화채권 콜옵션 미행사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 우리은행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다. 당장 한국의 대외신용지표 중 하나인 한국 국채(5년 만기)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5년 사이 최고 수준(70bp)으로 뛰었다. 이를 기초로 외화채권을 발행해야 하거나, 곧 조기 상환해야 할 한국 기업의 부담이 더욱 커지게 됐다. 특히 국내 50대 그룹(흥국생명은 태광그룹 계열사)까지 자금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점이 분명해지면서 가뜩이나 경색된 금융시장이 더 얼어붙을 전망이다. 레고랜드 사태 후 가시화한 기업 자금경색 상황이 점차 중견그룹, 대기업으로 ‘북상’하는 모양새다.

문제는 이게 위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어제 네 번째 자이언트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밟았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금리 인상 중단 고려는 매우 시기상조” “최종 금리 수준은 9월 예상보다 높아질 것”이라며 시장의 피벗(통화정책 기조 전환) 기대를 돌려세웠다. 지난달 잠시 ‘베어마켓 랠리’(약세장 속 반등)를 즐기던 미 증시는 크게 고꾸라졌다. 사실상 ‘강달러 질주’ 선언에 아시아·유럽 증시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Fed 결정은 한국에도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은 1%포인트로 벌어진 양국 간 금리차를 줄이기 위해 당분간 통화긴축 기조를 강하게 가져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이라는 다중 악재가 소비·투자·수출을 최악으로 내모는 상황이 당초 예상보다 ‘더 길고 더 고통스럽게’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금융시장 안정이다. 레고랜드 사태 후 정부는 대형 증권사와 시중은행을 동원해 100조원이 넘는 유동성 공급 대책을 내놨다. 그러나 이런 대응은 당면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허겁지겁 엮어낸 것으로 시장 친화적이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아 보인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필요하면 언제든 과감하고 충분한 강도로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이라도 범정부 차원의 ‘금융시장안정 비상대책반’(가칭)을 구성해 시장과 보다 긴밀하게 소통하며 위기상황을 관리해 나가야 한다.

정치권의 역할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작금의 위기 상황은 몇 달 내 끝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 국내외 경제기관들은 “사실상 스태그플레이션 단계” “이제야 긴 불황 터널의 초입” “내년이면 전 세계 33%가 경기 침체에 들어갈 것”이라는 경고를 쏟아내고 있다. 당장의 금융시장 안정대책도 중요하지만 이런 긴 불황에 대응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부채 감축을 통해 군살을 빼고, 규제·연금·노동·교육 등의 분야에서 구조개혁으로 경제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모두 정치권의 선도적 노력과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근로자와 기업들을 뛰게 만드는 것도 여의도의 몫이다. 법인·소득·부동산세 감면 법안이나 반도체특별법 등 위기 극복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꼭 필요한 법안들이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당리당략을 떠나 이런 시급한 경제·민생 법안부터 처리해야 한다. 경제 위기가 코앞이다. 대충 요행을 바라거나,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