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파업 투표까지 간 기아의 퇴직자 복지
미국의 자동차산업은 한때 미국인들에게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2019년 개봉 영화 ‘포드 v 페라리’엔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장면이 많다. 영화는 레이싱 무대에선 후발주자였던 포드가 1966년 이탈리아 페라리를 꺾고 르망이란 레이싱 대회에서 극적으로 우승한 실화를 그렸다. 당시 회장이었던 헨리 포드 2세의 대사가 인상 깊다. “포드가 전쟁을 치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닐세.” 포드가 2차대전에서 탱크를 만들어 연합군 승리를 이끌었다는 자부심이 스크린을 뚫고 나올 기세였다.

백인 중심 미국 사회의 쇠락을 다룬 2009년작 ‘그랜토리노’는 다른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72년산 포드차 그랜토리노를 36년째 소유한 포드 은퇴자다. 빠르게 변하는 세태와 타협하지 않는 보수적인 미국 전통세대를 대변한다. 하지만 자식에게 기대지 않고 꼬장꼬장한 모습을 지켜가는 데엔 경제적 안정도 있었을 것이다. 포드 퇴직자의 복지 시스템이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2000년대 중반까지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노동자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포드 GM 등은 퇴직자와 그 가족의 의료보험까지 부담했다. 이 때문에 당시 미국의 자동차 생산비용은 도요타에 비해 대당 1000달러 이상 높았다. 여기에 한국 일본 독일 등의 수입차 공세까지 겹쳐 포드는 2006년 127억달러 적자라는 창사 이래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결국 미국자동차노조(UAW)는 2007년 이후 3년간 기본급을 동결하고, 퇴직자 의료보험은 별도 기금을 만들어 운용하기로 사측과 합의했다. 노조는 파업 포기를 선언했다.

퇴직 후에도 과다 복지를 제공하는 사례는 한국 자동차 회사 기아에도 있다. 기아 노사는 기본급 인상분 외에 1인당 성과급을 2000만원 더 주는 내년도 임금협상안에 합의했지만, 퇴직자의 차량 할인 혜택을 줄이는 단체협상안은 조합원 반대로 부결됐다. 퇴직자에게 평생, 2년에 한 번씩 30%를 깎아주던 것을 75세까지, 3년에 한 번씩 25%를 할인해주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꾸면서 재직자 혜택을 늘리려던 사측 방침이 벽에 부딪힌 것이다. 지금같은 호시절이 얼마나 갈지 궁금하다. 과도한 복지는 늘 탈이 나게 돼 있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