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새끼줄을 뱀이라 우기는 이들에게
달빛 어스름한 시골길을 걷다가 길바닥에 기다란 무언가가 있어서 화들짝 놀란 경험이 있다. 뱀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누군가 버린 새끼줄이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이를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한다. 변계란 감정이나 욕망, 주관에 이끌려 잘못 헤아리고 억측하는 것이다. 소집은 잘못 판단한 대상이나 사실에 대한 집착이다. 이런 착각과 집착에서 벗어나 새끼줄을 새끼줄로 보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옛 선사들은 설파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른바 ‘비속어 논란’을 보면서 퍼뜩 든 생각이 새끼줄과 뱀의 비유였다. 사태의 시작은 단순했다. “국회에서 이 ××들이 승인 안 해주면 OOOO 쪽팔려서 어떡하나….” 미국 뉴욕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짧은 환담을 마치고 나오던 윤 대통령이 이동 중 혼잣말처럼 내뱉은 한마디였다. 공식 연설도, 대담도, 대화도 아닌데 공동 취재 중이던 방송사 카메라에 잡혔다. 대통령 본인은 기억에 없다고 한다지만 여기서 ××는 비속어임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OOOO은 행사장의 소음 때문에 무슨 말인지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MBC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이를 가장 먼저 보도하면서 불확실한 OOOO을 ‘바이든은’으로 해석한 게 문제였다. 현장 기자들 사이에선 바이든으로 들린다는 의견이 많았다지만, 그런 판단만으로 영상에 자막을 달고 내보낸 건 경솔했고 성급했다. 윤 대통령은 ‘1억달러를 글로벌 펀드에 공여하기로 방금 약속했는데 국회에서 거대 야당이 승인해주지 않으면 창피해서 어쩌나’라는 취지로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맥락상 여기서 바이든이 나올 이유가 없다. 게다가 한국은 국회, 미국은 의회다. 그런데도 자막에 괄호까지 넣어서 ‘(미국) 국회’라고 한 것은 어불성설이다.

MBC에 이어 다른 방송사와 신문들도 속보 경쟁을 하느라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그날 밤 11시에야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첫 보도를 통해 ‘바이든’으로 각인된 뒤엔 바이든으로 들리기 쉽다. 한국 대통령이 미국 의회를 비속어로 폄하했다는 자극적이고 휘발성 높은 뉴스는 국민의 뇌리에 커다란 뱀과 자라를 심어놓았다.
[토요칼럼] 새끼줄을 뱀이라 우기는 이들에게
하지만 음성인식 전문가인 성원용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명예교수는 SNS에 올린 글에서 “대통령의 발언을 자동음성인식기에 넣어 보니 어떤 인식기에서도 ‘바이든’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며 “이 문제의 핵심은 데이터 변조”라고 지적했다. 엉터리 자막은 음성 편집 변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성 교수는 “데이터 변조가 언론의 자유와 혼동된다면 정직과 투명,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거짓말과 술수, 선동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자막 왜곡 내지 조작이 온 나라를 뒤흔드는 갈등을 불러왔다. 더불어민주당은 박진 외교부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어제 국회 본회의에서 강행 처리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윤 대통령을 직격하며 공세를 이끌고 있다. 대통령의 비속어를 잘했다고 할 순 없지만 이렇게까지 나라를 뒤흔들 일인가. 엉뚱하게 미국, 바이든을 소환해 외교 문제로 만들려고 한 것이 온당한가. 윤 대통령의 이번 순방 외교 전체를 ‘외교 참사’로 규정할 만큼 엉망이었나. 지난 28일 방한한 영국 외무부 장관은 윤 대통령 부부의 엘리자베스 3세 여왕 국장 참석에 대해 사의를 표했고,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국장에 참석한 한덕수 국무총리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만나 뉴욕 정상회담에서의 공감을 토대로 양국 관계 개선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지난 29일 방한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은 윤 대통령을 만나 한·미 동맹 발전 방향을 논의하고, 미국의 인플레감축법(IRA)에 대해서는 법 시행 과정에서 한국 측 우려 해소 방안을 찾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해리스 부통령은 이른바 비속어 논란에 대해 “미국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고 바이든 대통령은 윤 대통령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다”며 허위정보와 가짜뉴스를 뜻하는 ‘disinformation’이란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고의성이 없이 실수로 잘못 알려진 정보인 ‘misinformation’과 달리 ‘disinformation’은 고의성이 있는 악의적 엉터리 정보라는 뜻이다. 성 교수는 ‘disinformation’에 관대한 사회는 결국 선동의 희생양이 된다고 강조했다.

30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후 최저치인 24%로 떨어졌다. 자막 왜곡과 ‘무능·참사’ 프레임은 일단 성공한 모양새다. 하지만 그것이 국민의 성공, 국가의 성공인가. 고금리·고환율·고물가의 ‘3고(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국익을 생각한다면 편견과 사심을 버리고 뱀과 새끼줄, 자라와 솥뚜껑을 구별할 줄 아는 눈부터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