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칼럼] 킹달러시대 '雜통화국'들의 비애
도스토옙스키는 “돈은 주조된(coined) 자유”라고 했다. 그가 오늘을 산다면 ‘달러는 자유’라고 썼을 듯싶다. 지금 온전한 대접을 받는 돈은 달러뿐이어서다.

달러 외의 모든 통화는 국경을 넘어서면 돈인 듯 돈 아닌 돈 같은 모호한 존재로 전락한다. 비트코인 이외 암호화폐를 ‘잡(雜)코인’이라고 칭하는 화법을 빌리면 달러 외에는 모두 ‘잡통화’다. 엔·유로·파운드·위안화도 매한가지다.

또 달러는 ‘자유’지만 달러 기축통화 시스템은 ‘부자유’다. 잡통화 보유국은 환율·금리·산업정책 어느 것 하나 자유롭지 못하다. 킹달러로 주저앉은 세계 경제에 무력감이 확산하는 이유다. 한국은 외환위기 후보국으로 지목됐지만 속수무책이다. ‘25년 연속 흑자국’이 한두 달 경상적자에 국가부도설까지 시달리는 기막힌 현실이다.

우리보다 더 분통 터지는 나라는 일본일 것이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합의로 이미 ‘잃어버린 20년’을 겪었다. 여기에 킹달러 쇼크가 덮치자 30년 전 수준으로 경제가 회귀 중이다. 올 무역흑자가 1조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도 역(逆) 환율전쟁 여파로 위기설에 휩싸였다. 왕년의 기축통화국 영국 역시 파운드화가 추락하며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설’이 불거졌다.

잡통화국들의 고난은 거의 미국발(發)이다. 플라자합의부터 재정·무역 ‘쌍둥이 적자’와 제조업 붕괴에 직면한 미국이 일본 독일 등을 압박한 결과다. 금세기의 정보기술(IT) 버블,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양적완화는 물론이고 진행 중인 인플레이션 쇼크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경제·통화정책 실수와 잘못된 대응이 촉발한 발작이다.

흔히 달러는 ‘트리핀 딜레마’를 안고 있다고 얘기한다. ‘기축통화 유지’와 ‘달러가치 보존’이라는 상반된 두 목표를 달성할 유동성 관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언제나 달러는 딜레마를 돌파해왔고 진퇴양난에 몰린 쪽은 잡통화국들이었다. 1971년 금태환 정지(닉슨 쇼크)를 세계 각국이 용인한 순간 딜레마가 미국에서 잡통화국으로 이전됐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은 종이로 금(달러)을 만드는 유일무이한 권력을 향유 중이다. 달러를 종이로 치부하면 세계 경제가 공멸하는 반전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달러체제의 출발은 1944년의 브레턴우즈 협정이다. 당시 영국 대표 케인스는 ‘방코르’라는 세계통화 도입을 역설했다. ‘국제수지 흑자경쟁’을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보고, 어떤 나라도 시장을 장악하지 못하는 시스템을 구상했다. 미국은 이에 대응해 ‘자국시장 완전 개방’과 ‘해상무역로 안전보장’이라는 파격 제안을 던졌다. 전쟁으로 초토화한 경제의 재건이 다급했던 유럽 등의 최종 선택은 ‘달러’였다. 이후 달러체제는 자본주의적 발전을 폭발시켰다.

역 환율전쟁발 패닉은 달러체제의 정당성과 지속 가능성에 큰 물음표를 던졌다. 달러가 이웃나라들의 ‘자유’를 잠식하고 인플레이션 수출로 근린궁핍화를 촉발하고 있어서다. 자국 이익에 매몰된 자의적·독점적 미국 통화정책이 세계 경제의 변동성과 취약성을 확대하는 부작용도 심각하다.

특정국의 미래가 달러의 선의에 좌우되는 상황의 무한반복은 분명 비정상적이다. 킹달러 조타수들의 실수가 없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는 일도 당혹스럽다. 게다가 반도체법과 인플레 방지법에서 보듯 킹달러는 우방의 제조업까지 넘보고 있다.

더 공정하고 안정적인 국제질서 구축이 시급하다. 자격 미달인 위안 체제, 통제불능 디파이 세상으로의 이행은 대안이 못 된다. 더 큰 불공정과 불안정을 초래할 공산이 크다. 핵심은 제3국이 파괴적인 통화전쟁에 휩쓸리지 않을 자유의 확보다. 그러자면 시장 개방, 무역루트 보호라는 브레턴우즈 협정을 넘어서는 킹달러 제국의 추가 약속이 필수다. 자국 문제를 이웃에 떠넘기고 통화스와프마저 압박 지렛대로 삼는다면 달러체제 이탈의 원심력만 커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