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칼럼] '빅보스' 黨 대표 체제 허물 때 됐다
지금 여야가 처한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내용과 형식은 다르지만 모두 ‘대표 리스크’를 안고 있다. 국민의힘은 이준석 전 대표를 둘러싼 내분으로 집권 5개월 가까이 갈팡질팡하면서 집권당 역할은 뒷전이 돼 버렸다. ‘비대위 시즌2’ 운명도 정치의 사법화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면서 판사 방망이에 달렸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표직이 ‘사법리스크 방탄’으로 활용되면서 당과 대표의 운명이 한묶음이 돼 버렸다. 대표 사당화(私黨化)라는 말이 나도는 것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극명한 증표다.

여야가 ‘대표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게 된 근원적 원인은 뭔가. 한국 정당은 대표를 정점으로 강고한 중앙당 중심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3김 정치’에서 봐 왔듯 중앙당은 ‘빅보스’의 개인 소유물처럼 돼 왔다. 정당 활동에 지속성이 있어야 이념과 철학이 축적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정당은 이념과 철학보다는 빅보스의 운명 또는 정치 득실에 따라 수시로 서커스단 가설(假設)무대처럼 문패를 바꿔 달거나 이합집산을 거듭해왔다.

정당이 인물을 만드는 게 정상인데 인물이 정당을 만들면서 ‘떴다방 정당’이 돼 버렸다. 제헌국회가 출범한 이후 지금까지 정당의 평균 수명이 2년6개월에 불과한 것은 한국 정당의 허약성을 잘 보여준다. 절대적 권한을 가진 총재 시스템 유산이 여전히 우리 정치권을 맴돌며 국민의힘에선 처절한 대표직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당은 대표 권한을 더 강하게 만들어 개인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퇴행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중앙당 대표 중심의 수직적 구조는 여러 폐단을 낳는다. 의원들은 대표 개인을 위한 돌격대 역할을 하면서 정당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당론 중심이 어떤 부작용을 낳았는지는 익히 봐 왔다. 당권을 위한 계파 간 생사를 건 다툼, 공천 학살 등 어두운 그림자가 정치권을 드리웠다. 의원들은 보스에게 줄을 서고 보스는 당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들의 앞날을 챙겨주는 ‘담합 정치’ 시스템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대표직을 둘러싼 국민의힘 내분도 2024년 총선 공천권을 누가 가지느냐가 핵심이다.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도 총선에서의 당내 세력 확장, 이를 통해 차기 대선으로 가는 길을 넓힐 필요가 있다.

보스의 말을 거스르는 것은 역적이나 다름없고, 배신으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지금도 팬덤에 의해 좌표 찍혀 난타 당하기 두려워 소신 발언을 내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의회 정치의 위기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계파 해체 선언이 나왔지만 말뿐이었고 지금도 윤핵관, 이핵관, 친명, 비명 등 편 가르기 단어들이 횡행하고 있다. 3김 시대엔 민주화를 위해 강한 구심이 필요했다고 하더라도 다원화된 지금도 강한 중앙당과 대표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이는 필시 정치 과잉을 부를 수밖에 없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중앙당 대표 중심의 대중 정당 체제를 해체하고 원내 정당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원내 정당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물론 우리처럼 대통령제인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중앙당도, 대표도 없다. 프랑스도 원내대표가 당을 실질적으로 이끈다.

중앙당 대표 중심의 정당은 입법보다는 당권 장악 등에 무게 중심을 두다 보니 권력 투쟁에 빠지기 쉬운 반면 원내 중심으로 돌아가면 민생을 위한 입법에 치중할 수 있다. 대선 등 선거 땐 선대위원회를 구성해 대응하면 된다. 원내 정당화가 되면 중앙당 공천 대신 상향식 공천이 자리 잡게 되고, 공천권을 둘러싼 계파 간 싸움도 잦아들면서 정당 민주화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의원들은 빅보스 대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소신 정치가 발을 붙일 터전 마련도 가능하다.

물론 중앙당 대표 체제 폐지와 원내 정당화가 만능일 수는 없다. 자칫 정당 정치의 약화를 부를 수 있다. 대표→중앙당→시·도당→당협위원장으로 이어지는 거대 조직을 건드리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선거가 있는 한 중앙당이 없어져도 파벌 정치가 사라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상향식 공천이 현역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무수한 중앙당 대표 체제의 폐단을 보면 적어도 원내 정당화를 위한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