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베컴의 13시간 줄서기
“주말이면 영국인들은 리치먼드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선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보트 줄을 서고, 그다음엔 차 마시기 위한 줄, 아이스크림 줄, 그러고는 그냥 재미 삼아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줄을 선다. 그리고 다시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서고 시간이 남으면 그제서야 자기 삶을 위해 시간을 보낸다.”

‘영어를 배우기 위한 최고의 책 50권’ 중 하나로 꼽히는 <외계인이 되는 법(How to be an alien>의 작가 조지 마이크는 영국인의 줄서기 습관을 이렇게 풍자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줄서기는 영국인의 ‘국가적 열정’이라고도 했다. 영국인이 일생 줄 서는 데 쓰는 시간만 6개월이 된다는 얘기도 있다.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는 줄을 서서 경기장에 입장하는 방법에 대해 30쪽짜리 안내서가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추모 과정을 통해 영국인의 줄서기가 다시 화제가 됐다. 템스강을 따라 여왕의 관이 안치된 웨스트민스터 홀까지 이어지는 조문 행렬은 최장 16㎞, 단 3분 참배를 위한 대기 시간은 최장 30시간까지 걸렸다. 런던탑과 런던브리지를 배경으로 템스강변에 길게 이어진 조문 행렬 보도 사진은 흡사 예술 사진을 보는 듯하다.

날씨 궂기로 유명한 런던의 쌀쌀한 가을밤을 꼬박 새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질서정연하게 추모 행렬을 이어가는 모습에 영국인 자신도 대견스러워했다. “우리에겐 ‘Q’로 시작하는 두 가지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여왕(Queen)을 사랑하고 줄서기(queue)를 즐기는 마음이다.”(스티븐 코트렐 요크 대주교)

이번 줄서기에는 일체 특권의식이 없다. 영국의 대표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은 새벽 2시15분쯤 혼자 와서 13시간 줄을 선 끝에 다음날 오후 3시30분께 참배했다. 그는 “여왕은 우리를 항상 안심시켰고 이런 분이 국가에 태어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제2차 대전 당시 수송보급 장교로 근무하며 직접 군용트럭을 몰았다. 세계 52개국에 달하는 영연방(Commonwealth) 체제를 흔들림 없이 이끌어 온 것은 그의 헌신적 리더십 덕이었다.

30여 년간 줄서기를 연구해 ‘줄 박사(Dr. Queue)’로 불리는 미국 MIT의 리처드 라슨 교수는 줄 서는 원리를 “실시간 수요가 실시간 공급을 초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여왕에 대한 ‘추앙의 수요’가 부럽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