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부자감세라는 이름의 혐오 캠페인
금수저, 흙수저는 태생적 불평등을 비꼬는 말이지만 불공정의 증거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어떤 선택권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의 좋은 유전자를 받는 것,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고 교육받는 것 모두 우연의 소산이다. 국가가 가난한 청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기회 균등을 통해 계층 이동 가능성을 넓히는 정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태어날 때 받아든 격차를 뒤집기가 쉽지 않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어떤 사회에서든 부자(고소득자)는 상대적 소수다. 선망과 질시를 동시에 받는다.

부자들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고 자존감을 확인한다. 선망하는 마음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신분 상승 욕구를 자극한다. 더 높은 소득과 지위를 갖기 위해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에너지원이 된다. 하지만 부러워하는 마음이 지나쳐 시기심으로 나아가면 부자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체제에 대한 불신과 분노도 강해진다. 부자들을 끌어내려 ‘결과의 평등’을 만들자는 유혹에 빠져들기도 한다.

더불어민주당과 좌파·진보 진영이 법인세 상속세 종합부동산세 등에 대한 감세 논의가 나올 때마다 ‘부자감세’라는 프로파간다를 들고나오는 데는 부자에 대한 생래적 시기심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저의가 담겨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부자감세가 아니라 감세 자체를 비판할 일인데 말이다. 소득세든, 법인세든 소득 상위 10%가 대부분의 세금을 부담하는 구조다. 감세는 원천적으로 세금 안 내는 사람과는 관련이 없는 정책이다. 그런데도 굳이 ‘부자’를 끼워 넣는 것에는 부자와 서민을 갈라치기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부자감세해줄 돈으로 서민 복지를 확충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자와 빈자는 제로섬 게임의 참여자들이 아니다. 만약 제로섬 구조라면 부자들이 증가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져야 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부자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부자가 늘어나면 자본 투자와 일자리 확대로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줄어든다. 고급 아파트와 자동차, 명품은 주로 부자들이 소비하지만 이들 산업에서 돈을 버는 대다수 사람은 임금 근로자다. 감세의 경제 활성화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감세를 통해 생겨난 민간 여윳돈이 생산이나 고용으로 흐르지 않고 양극화만 부추겼다는 보고서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준다’는 논의의 출발선 자체가 시혜적이고 불온하다. 납세자 부담을 덜어준다고 하는 것이 온당한 표현이다. 마치 부자들에게 걷어야 할 세금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듯이 국가가 징세권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납세자는 국가 재정의 고객이며 정치적 주권자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돌려주는 세금의 경제적 효과와 기존 재정지출의 효용을 따지는 것은 정책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실려있느냐에 따라 상대적이다. 하지만 어엿한 경제 이론으로 정립돼 있는 재정의 민간 구축 효과까지 제쳐놓을 정도로 정부의 재정 운용 능력이 탄탄할까. 그렇지 않다. 어떤 나라든 재정 지출의 비효율성은 좌우 정파를 가리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 국회는 예산 결산심의 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다.

부자감세 프레임은 악의적이다. 부자 지갑 채워주려고 가난한 사람 복지 예산을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서민팔이, 민생팔이 정치인들은 여기에 포퓰리즘이라는 독버섯을 키운다. 잘못된 주장이 되풀이되고 동조자들이 늘어나면 마침내 거짓이 진실 행세를 한다. 시기심은 정당화되고 한방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선동이 먹혀든다. 하지만 양극화의 근본적 문제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의 존재다. 부자를 끌어내린다고 가난이 구제되는 것이 아니다. 교육과 산업 육성, 적절한 복지 제공을 통해 가난한 사람을 얼마나 빠른 속도로 줄여나가느냐가 관건이다.

정치가 잘사는 사람에 대한 미움을 부추기고 대중의 분노를 법제화하는 나라의 경제는 망한다. 무엇보다 인간성을 저열하게 파괴한다. 시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부러워하는 인간만으로 가득한 세상을 상상해보라. 지성도, 문명도 모두 파탄이다. 경제적 자유가 소멸되고 사회적 이동성은 질식될 것이다. 시기심이 아무리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한 사회의 정의(正義)로 세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