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새는 얼굴을 알건만


산새는 옛날부터 산 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만
관아의 호적에는 아예 들 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
큰 창고에 쌓인 쌀 한 톨도 얻기 어려워
강가 누각에 홀로 기대어 저녁밥 짓는 연기만 바라보네.

山禽舊識山人面, 郡藉今無野老名.
一粒難分太倉粟, 江樓獨倚暮烟生.


* 정초부(1714~1789) : 조선 후기의 노비 출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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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양반들의 존경을 받은 ‘노비 시인’ 정초부
정초부(鄭樵夫)는 조선 정조 때 사람입니다. 초부란 나무꾼을 뜻하니 ‘정씨 나무꾼’이죠. 최하층 신분입니다. 지금의 양평 지역에 있는 여씨 집안의 가노(家奴)였지요.

그런 노비가 어떻게 한시를 지을 줄 알았을까요. 운율과 성조, 기승전결을 두루 맞추기 위해서는 10년 이상 공부하며 내공을 익혀야 합니다. 10개가 넘는 규칙을 지키면서 문학성까지 발휘해야 하니 양반들에도 쉬운 작업이 아니었죠.

노비 신분 벗어난 뒤에도 쌀이 없어

정초부는 어릴 때부터 낮에는 나무하고 밤엔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주인이 낭독하는 글을 듣고 바로 외워버릴 정도로 재주가 남달랐죠. 그런 그를 주인이 기특하게 여겨 자제들과 함께 글을 읽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학업 성취가 매우 빨랐고, 곧 시 잘 짓는 나무꾼으로 경기 일대에 명성이 자자해졌지요.

그는 특히 과거시험에 쓰이는 과시(科詩)를 잘 지었습니다. 주인집 자제들이 과거에 급제하도록 도와주기까지 했죠. 이 덕분에 노비에서 벗어나 양인으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지식을 뽐내는 것보다 정감이 넘치는 시를 많이 지었어요. 하층민이라고 해서 독설과 비판이 담겨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속으로 익히고 견디는 자세가 돋보인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양인이 된 후로도 전처럼 나무를 해야 했어요. 장작을 양평에서 나룻배로 싣고 와서 지게로 운반한 뒤 동대문 시장에서 팔았답니다. 가난한 그가 하루는 관아를 찾아가 쌀을 꾸려고 했죠. 그런데 호적대장에 그의 이름이 없어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쌀을 구하지 못한 그는 주변의 누각에 올라가 서글픈 마음을 시로 표현했지요.

‘산새는 얼굴을 알건만’이 바로 그 작품입니다. 이 시도 울분을 드러내기보다는 인내하고 삭이는 자세가 엿보이는 작품인데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끌어당겼지요. 군수가 이 시를 듣고 설마 하는 마음에 다른 제목을 주면서 그에게 시를 지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금방 시를 지어내는 게 아닌가요. 깜짝 놀란 군수는 곧바로 쌀을 하사한 뒤 그 사실을 주변에 널리 알렸습니다.

김홍도 그림 속에 적힌 정초부의 시

이후 정초부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퍼졌죠.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그와 시를 주고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의 시에 감명받은 양반들이 양평 월계협에 있던 집으로 찾아오기까지 했죠. 조선 후기 최고 시인들의 작품을 실은 『병세집』에도 그의 시가 11수나 실려 있습니다.

‘동호(東湖)’라는 시도 뛰어납니다.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러/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노을 진 산빛만이 빈 못을 채우나니(東湖春水碧於藍, 白鳥分明見兩三. 柔櫓一聲飛去盡, 夕陽山色滿空潭).’

동호는 지금의 서울 옥수동 부근 한강을 말하지요. 이 또한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시입니다. 김홍도 그림 ‘도강도’(渡江圖)에 이 시가 적혀 있는데, 원작가의 이름이 없어 김홍도의 시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요. 봄날 오후의 고즈넉한 한강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슬픔을 속으로 삭인 뒤에 나오는 담백한 감흥이 절제미의 진수를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지요.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