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도어스테핑과 A4용지
국면이 어려울 때, 윤석열 대통령은 거의 본능적으로 돌파를 시도한다. 누구나 바라지만 이루기 어려운 돌파를 그는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로 선거에서 이긴 것이 대표적이다. 당선되자, 그는 먼저 평택 기지를 찾아 미군 장병들을 위문했다. 이 방문으로 문재인 정권 아래 많이 허물어진 한·미동맹이 단숨에 복원됐다.

이어 대통령실 이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나와야 한다는 인식은 널리 퍼졌고, 문 전 대통령도 공약으로 내세웠다. 문 전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로 이전이 어려워지자, 윤 대통령은 파격적 돌파에 나섰다. 당선인 자신이 지시봉을 들고 시민들에게 새 집무실에 관해 설명하는 모습은 우리 정치사의 멋진 장면들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취임 뒤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 참석, 일본과의 관계 개선, ‘검수완박’에 대응하는 경찰국 신설, 그것에 반발한 경찰 간부들의 집단행동 진압, 대우조선해양 불법점거 해산 같은 돌파들이 나왔다.

이들 가운데 가장 뜻밖인 것은 도어스테핑(doorstepping)이다. 말뜻대로, 도어스테핑은 사람을 문간에서 붙잡고 억지로 답변을 끌어내는 행위다. 따라서 윤 대통령이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는 일을 도어스테핑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어쨌든, 정치 지도자가 기자들과 날마다 만나 소통하는 관행은 혁신적이다. 이 조치의 혁신성은 전임자와의 대조에서 뚜렷해진다. 윤 대통령이 소통을 시도한 반면, 문 전 대통령은 선전으로 일관했다. 문 정권은 전체주의적 특질이 가장 짙었던 정권이다. 전체주의는 시민들을 지도자가 고른 목표들에 동원하는 이념이다. 따라서 선전이 소통을 대신한다.

실제로, 문 전 대통령은 소통을 시도한 적이 없다. ‘사실로부터 자유로운’ 내용이 적힌 A4용지를 들고 비서들에게 낭독해주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시민들에게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그런 관행은 안전해 보인다. 그러나 소통 대신 선전을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해롭다. 임기 말년에 그의 얘기를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고 여긴 시민이 몇이나 되었나? 그렇게 A4용지에 의존하다 보니, 그것 없이는 불안하게 됐고, 급기야는 정상회담에도 그것을 들고 나가게 됐다. 결국 명민한 대통령이 정신 건강에 관한 소문에 휩싸였다.

대본이 없으니, 출근길 문답은 위험할 수밖에 없다. 적대적 언론은 이런 위험을 극대화한다. 사소한 실수들이 부각되고, 대통령의 얘기에 담긴 주제는 흔히 묻힌다. 그래서 시민들과의 소통에서 시도한 돌파는 아직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혁신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진화할 터이고 성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그는 전임자가 걸은 길을 피할 것이다.

전체주의적 정권으로부터 권력을 실제로 회수하는 일은 늘 힘들고 위험하다. 이명박 정권이 겪은 ‘광우병 파동’은 그 사실을 아프게 보여주었다. 이번에도 선거에서 진 정권은 국회, 사법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장악하고서 현 정권의 작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한다. 실은 행정부에서도 전 정권의 수많은 비리에 가담한 ‘곯은 달걀들’을 골라내는 데 시간이 걸린다. 북한과 중국의 부정적 영향은 가늠하기 힘들 만큼 크고 상시적이다.

잇단 돌파를 통해 윤 대통령은 최악의 조건 속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정권을 안정시켰고 허물어진 나라의 기틀을 일으켜 세웠다. 안타깝게도, 그런 성취는 낮은 지지도에 묻혀버렸다. 이 문제의 핵심은 선거에서 그를 지지한 시민들의 지지 철회다. 이념적으로 깊이 분열된 사회에선 어떤 지도자도 높은 지지율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지지층의 이탈은 치명적이다.

선거에서 윤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한 사람일수록 그에 대한 실망과 서운함이 크다는 사정은 현 정권이 맞은 가장 큰 위험이다. 그런 상황은 시국관에서 윤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상당히 다른 데서 비롯했다. 선거부정 의혹, 좌파의 본질에 대한 견해, 노조의 정치적 투쟁에 대한 대응에서 견해 차이가 특히 크다. 윤 대통령이 이탈한 지지자들의 신뢰를 되찾으려면, 자신의 시국관을 뚫고 나오는 개념적 돌파(conceptual breakthrough)를 시도해야 한다. 걱정스럽게도, 이것은 돌파들 가운데 가장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