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전문가와 경제계 반대 속에 ‘주 52시간제’가 전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더불어민주당은 근로자들도 이제 ‘저녁 있는 삶’을 누리고 있다고 자화자찬해왔다. 하지만 중소기업중앙회가 어제 내놓은 중소 조선업체 근로자 대상 설문조사를 보면 저녁 있는 삶은커녕 삶의 질이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주 52시간제로 삶의 질(워라밸)이 ‘좋아졌다’는 응답은 13%에 불과했고 ‘나빠졌다’는 55%에 달했다. 나빠진 이유(복수응답)로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소득 감소’(93%)와 ‘소득 보전을 위한 불가피한 투잡’(36%)을 지목했다. 노동자를 위한다며 밀어붙인 정책에 노동자가 불만을 터뜨리는 현실은 주 52시간제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설계됐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 그리 놀라운 결과도 아니다. 24시간 설비가 가동되고 외국인 근로자 공급도 부족한 제조 현장에서 주 52시간제를 강제화한 데 따른 예고된 부작용일 뿐이다. 제조 현장만의 문제도 아니다. 회사별·업무별 사정이 제각각인 상황에서 경직된 제도를 밀어붙이면 갖가지 문제 발생은 필연적이다. 계절적 특수가 있는 기업, 프로젝트별로 돌아가는 벤처, 시간 싸움이 생명인 연구소, 시차가 있는 외국과 거래하는 금융업에까지 일률적으로 강제하는 주 52시간제를 누가 납득할 수 있겠나. 회사는 공정에 차질을 빚고, 근로자는 소득 감소에 시달리고, 경제는 활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주 52시간제를 손봐야 할 이유가 쏟아지지만 새 정부의 대처는 한가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1주 최대 52시간’으로 규정된 근로시간을 ‘월단위 총량관리’로 바꾸겠다는 합리적인 구상을 내놨지만 대통령이 바로 부인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주 52시간제 유연화를 공약한 대통령이라면 더 근본적인 개혁을 주문해야 할 텐데 노동계 눈치부터 살피는 모호한 태도라는 비판이 불가피하다. 이래서야 만천하에 천명한 노동개혁 의지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이제 친노 일색의 거대 야당이나 좌파 사회단체들의 주장보다 현장 근로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요구는 분명하고 합리적이다. 개별 기업과 노동시장별 특성에 맞는 유연화의 길을 터 달라는 것이다. 근로자가 원한다면 주 52시간 근무로 30년 일하는 대신 주 78시간 근무로 20년 일하고 조기 은퇴하는 선택지도 주어지는 게 옳다. 선진국에서 하고 있는 정도의 융통성과 유연성에도 눈치를 본다면 우리 경제의 구조개혁은 요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