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출근때마다 남편이 해준 말
1980년대 나와 같이 경영학석사(MBA) 과정 공부를 한 미국 친구 중에는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s)족’이 많았다. 특히 부인의 커리어 쌓기에 적극적인 남편이 많았는데, 당시 그들 사이에는 “부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녀가 있으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모두 ‘내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중 한 명은 내 결혼 소식을 듣더니 “내 아내는 똑똑해서 나중에 CEO까지 될 테니 아이가 있으면 안 되지만, 너는 보통(average)인 것 같으니 평범한 삶을 포기하지 말고 아이도 낳으라”는 친절한 조언까지 해줄 정도였다. 당시 미국은 여성들도 커리어를 가지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지만, 유리천장을 뚫고 최고까지 가려면 발에 추(?)를 달고 경쟁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지원하는 문화예술 창작자들에게 “결혼을 잘해야 한다”고 조언하곤 하는데, ‘결혼을 잘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프로그램에 선발되는 아티스트들은 해당 분야 신인으로서는 인정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렇더라도 전문가로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특히 인디 뮤지션이나 신인 감독들의 경우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는 단계에 서 있기 때문에 경제적 안정을 보장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자는 상대방의 예술성을 인정해주고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중요하다. 나는 좋은 배우자의 조건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고, 존중이 바탕이 되는 결혼이야말로 ‘잘한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남편이 특별히 외조를 잘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항상 남편의 직장이 우선이어서 그에 맞춰 자주 이사를 해야 했고, 그렇다고 남편이 집안일을 잘 도와주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남편은 내가 회사에서 속상해하면 항상 내 편을 들어줬고, 내가 계속 일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돼주었다. 내 일에 대한 존중은 물론 내가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주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어서인 것 같다.

결혼 직후부터 최근까지, 남편은 내가 출근할 때마다 항상 이렇게 말하곤 한다. “싸우지 말고, 잘난 척하지 말고, 열심히 하고 와.” 수십 년간 한결같이 건네주는 이 말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도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오랜 세월 나를 버틸 수 있게 해준 배우자의 믿음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