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
디폴트(default)라는 단어는 실패, 결핍을 뜻하는 라틴어(defallita)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중세를 거치며 ‘부족하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뜻의 동사로 발전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우리는 당혹감을 느낀다. 해야 할 계약상의 의무를 하지 않는 ‘채무 불이행’을 디폴트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당혹감의 제도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를 극복할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경우’의 대응책을 미리 설정하는 것이다. 컴퓨터 등 전자기기에서 별도의 명령을 입력하지 않았을 때 적용되는 기본값을 디폴트값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고령사회로 진입한 이후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해에만 40조1000억원 증가해 총 295조6000억원을 기록했다. 특히 개인이 직접 운용해야 하는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과 개인형 퇴직연금(IRP)의 성장세가 무섭다. 아직까지는 퇴직급여액을 미리 정하는 확정급여(DB)형 비중이 더 높지만(171조5000억원, 58%), 작년 적립금 증가액만 보면 DC형과 IRP(22조5000억원)가 DB형(17조6000억원)을 압도한다.

DC형과 IRP의 선전은 자본시장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것과 궤를 같이한다. 단기 성과나 시장 충격에 휘둘리기보다 미래 경제 성장 가능성을 믿고 시간 지평을 길게 보는 투자자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증좌인 셈이다.

문제는 가입자 스스로 미래 자산을 운용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직장인에게 퇴직연금은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존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DC형 퇴직연금은 본래 도입 취지와 달리 성장의 과실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했다. DC형 적립금의 79%가 원리금 보장상품에 방치된 것도, 국민연금보다 계속해서 낮은 운용수익률을 기록하는 이유도 결국 ‘마땅히 있어야 할 가입자의 운용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퇴직연금 가입자나 퇴직연금 사업자인 금융회사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지난 7월 12일 시행된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 이른바 디폴트옵션은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별도 운용 지시가 없어도 가입자가 미리 적격상품에 투자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이를 통해 연금 가입자는 수익률을 제고하고, 우리 경제는 장기 투자와 자산배분 효과를 통해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당혹감을 느끼며 문제를 방치하는 시절은 끝났다. 새로 도입된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이 우리 연금시장에 실패, 결핍, 의무 불이행이 아니라 최소 기대치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기본값으로 자리매김하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