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스타트업들이 모여 있는 서울 테헤란로
국내 주요 스타트업들이 모여 있는 서울 테헤란로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는 사업을 하면서 두 번 “가슴이 뛴다”고 했다. 첫 번째는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와 한양대 앞에서 PC방을 열었을 때다. 그해 그가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설립한 한게임은 NHN(현 네이버)과 합병을 거쳐 국내 대표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성장했다. 두 번째 시기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던 2008년이다. 김 창업자는 벤처기업 아이위랩을 인수하며 재기에 나섰다. 이 회사는 2년 뒤 ‘카카오톡’을 출시하면서 지금의 카카오그룹으로 컸다. 우리나라 양대 빅테크 기업인 네이버와 카카오는 한국 경제가 가장 위축됐던 시기에 성장의 싹을 틔운 것이다.

글로벌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구글 페이스북 등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2008년 전후로 경쟁자를 따돌리고 글로벌 최강자로 우뚝 섰다. ‘위기 속의 빅테크 탄생’은 이번에도 재현될까. 올 들어 기업공개(IPO) 시장이 크게 위축되면서 ‘투자 겨울’이 도래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많은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VC)들은 오히려 이를 신산업 진출과 인재 확보를 위한 ‘사냥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OTT, 커머스 등 ‘적자’만 살아남는다

26일 글로벌 벤처투자 정보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글로벌 벤처투자 규모는 올 2분기 1085억달러(7651건)로 1분기의 1416억달러(8990건) 대비 23% 감소했다. 특히 상장을 앞둔 기업일수록 투자가 위축됐다. 1억달러 이상 메가딜은 505억달러 규모로 직전 분기 대비 31% 급감했다. ‘그동안 성장성을 믿고 앞다퉈 돈을 태웠지만 이제 상장을 앞두고 냉정하게 따져보니 그동안 몸값이 지나치게 높았다’는 의미다. 주식시장이 얼어붙으면서 IPO와 특수목적합병법인(SPAC) 건수는 각각 15%, 26% 감소했다.
 그래픽=전희성 기자
그래픽=전희성 기자
인수합병(M&A)도 2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전자상거래(e커머스), 지식재산권(IP), 핀테크 분야 플랫폼 사업체들만 놓고 보면 확 달라진다. 경쟁기업을 따돌릴 수 있는 ‘호기’로 보고 공격적으로 기업 사냥에 나서고 있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M&A 시장이 뜨겁다. 국내 스타트업 투자정보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인수합병되거나 영업양수도를 진행한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은 총 84개로, 지난해 같은 기간(57개) 대비 47% 급증했다. 주식시장 불황으로 상장 직전(프리IPO) 단계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수가 19개로 지난해 상반기 22개에서 감소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동안 외형 확대 경쟁을 벌인 의류 커머스 플랫폼과 설비투자 경쟁이 치열한 적자 플랫폼들의 ‘적자생존’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CJ ENM에서 분사한 티빙과 KT스튜디오지니의 ‘시즌’이 합병되면서 웨이브, 왓챠 등 나머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IPO 불황으로 자금난에 시달리는 바이오테크 가운데 기술력 있는 기업들이 대거 매물로 나올 수 있다.

한 VC 대표는 “불황 시기는 자금 사정이 안 좋은 알짜 기업을 사들일 좋은 기회”라며 “앞으로 3~6개월간 아주 역동적인 시장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사냥의 시간’이 왔다

글로벌 VC는 불황의 시기를 적극적인 사냥 기회로 삼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 기반 VC인 세쿼이아캐피털은 지난달 인도와 동남아시아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해 28억5000만달러 규모 펀드를 결성했다. 역내 조성된 펀드 가운데 최대 규모다. 세쿼이아는 지난 5~6년간 고투(고젝과 토코피디아 합병기업), 원챔피언십, 지링고 등에 투자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엔 인도와 동남아 스타트업 전용 펀드를 처음으로 조성했다.
불황 때 열린 M&A 큰장…알짜 스타트업 '사냥의 시간'이 왔다 [허란의 VC 투자노트]
벤처투자 불황기에도 글로벌 VC들의 러브콜을 받는 인도는 역대 최고 M&A 실적을 기록 중이다. 벤처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인도는 2020년과 2021년에 각각 106건, 267건의 스타트업 인수가 진행됐는데 올 들어 이미 189건의 인수가 이뤄졌다. 분야별로는 핀테크 21건, 에듀테크가 18건으로 가장 활발했다.

최근 인도 M&A업계를 달군 조마토의 승부수가 대표적이다. 인도 최대 음식 배달 플랫폼 조마토는 이달 식료품 배달 스타트업 블링킷을 445억루피(약 7400억원)에 최종 인수하기로 했다. 종합 배달서비스 사업을 확대해 소프트뱅크가 투자한 스위기와 ‘몸집’ 경쟁을 벌이기 위해서다.

미국 헤지펀드 타이거글로벌이 투자한 인도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굽숩은 기업과 소비자 간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달 인공지능(AI) 기반 소비자 옴니채널 원다이렉트를 인수했다. 지난 2월 인도 소셜미디어 셰어챗의 ‘인도판 틱톡’인 MX타카탁 인수는 이용자를 확대하고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PwC 인도의 아밋 나콰 리더는 “VC들은 향후 12개월 동안 생존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는 포트폴리오사에 M&A에 눈길을 돌리도록 권유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내 알짜 스타트업 누가 샀나

국내 스타트업과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기업)들도 최근 공격적으로 기업을 사들이고 있다. 올해 들어 이달 22일까지 93개 스타트업이 인수합병(영업양수도 포함)됐으며 이 중 스타트업이 인수한 게 43개 사에 이른다. 대부분 신산업 진출이나 인재 확보 용도다.

명함관리 앱 ‘리멤버’를 운영하는 드라마앤컴퍼니는 외국계 신입·인턴 채용 플랫폼 슈퍼루키를 인수했다고 지난 25일 밝혔다. 앞서 4월 전문가 네트워크 기업 이안손앤컴퍼니를 인수하며 기업간(B2B) 리서치 서비스에 나서더니 신입 직원 채용 중개까지 손을 뻗친 것이다.

알람 앱 ‘알라미’를 운영하는 딜라이트룸은 생활 습관 관리 앱 ‘마이루틴’을 개발한 마인딩을 인수했다. 아침 기상 습관을 관리하는 수준에서 한 발 더 나가 이참에 생활 습관 전체를 아우르겠다는 심산이다. 다음달 미국으로 서비스를 확장할 계획이다.

모바일 금융서비스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는 알뜰폰 사업자인 머천드코리아 인수로 신규 사업에 진출했다. 대출 추천 앱 핀다는 빅데이터 상권분석 스타트업 오픈업을 인수했으며, 마이리얼트립은 키즈 여행 플랫폼 ‘동키’를 운영하는 아이와트립을 인수해 가족 단위 고객 확보에 나섰다.

세금 환급 서비스 ‘삼쩜삼’을 운영하는 자비스앤빌런즈는 증강현실(AR) 기반 비디오 채팅앱 스무디를 끌어안았다. 세금 조회 서비스 외에 상시적인 콘텐츠와 서비스를 제공해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이 밖에 세탁특공대와 몸집 경쟁을 벌이고 있는 ‘런드리고’의 운영사 의식주컴퍼니는 호텔 세탁사업자 크린누리와 무인 세탁소 운영사 펭귄하우스를 각각 인수해 신규 시장에 진출했다.

패션 분야 스타트업엔 VC들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가수 지드래곤의 누나인 권다미 씨가 공동대표를 맡아 화제가 된 패션 브랜드 ‘웰던’의 레어마켓은 연초 미국 세쿼이아에 1000억원 규모로 인수됐다. 여성 의류 전문몰 ‘츄’ 운영사에서 컬러렌즈 제조사로 변신한 피피비스튜디오스는 LB인베스트먼트와 중국 회사가 사들였다.

독자 생존 못하면 도태

불황 때 열린 M&A 큰장…알짜 스타트업 '사냥의 시간'이 왔다 [허란의 VC 투자노트]
전문가들은 스타트업·테크기업 간 합종연횡에서 소외되거나 뚜렷한 수익 모델을 확보하지 못한 기업은 빠르게 도태될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이들 기업이 ‘연명’할 수 있는 자금이 시중에 풍부했지만, 이제는 투자자들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세계적으로 리테일(소매 분야) 스타트업의 자금난이 특히 심각하다. CB인사이트에 따르면 2분기 소매 분야 벤처투자 규모는 132억달러로 1분기(232억달러) 대비 43% 쪼그라들며, 전체 벤처투자 감소 폭을 압도했다.

국내 상황도 다르지 않다. 정보업체 스타트업레시피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컨슈머 테크에 몰린 VC 투자금은 3조7771억원으로 전체의 31.4%를 차지했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 기준 1조2656억원, 22.2%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 VC 대표는 “마케팅 비용이 끊긴 커머스 중 MAU가 하락하는 곳들은 살아남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적자 플랫폼에 대한 시장의 인내도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내다봤다.

발란, 머스트잇, 트렌비 등 3사가 비슷한 사업 모델로 경쟁하고 있는 명품 거래 플랫폼은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몸값’이 가장 비싼 발란은 최근 투자라운드에서 목표 기업가치를 당초 8000억원에서 7000억원으로 낮췄다. 한 VC 심사역은 “자체 판매(PB) 상품 없이 외부 브랜드 제품에 의존하는 플랫폼은 많이 팔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동대문 의류 상권에 기반한 지그재그, 브랜디, 에이블리 등 3사 플랫폼도 출혈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반면 불황의 시기를 지나면서 살아남는 플랫폼에는 더없는 기회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패션 플랫폼 1위인 무신사는 지난해 115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내며 현금 및 현금성 자산만 1865억원을 쌓아두고 있다. 10·20세대 남성을 겨냥한 PB 제품과 7000여 개 신진 디자이너 상품에 기반한 덕분이다. 무신사 관계자는 “그동안 과도한 몸값 때문에 개발자를 구하기 쉽지 않았는데 오히려 좋은 인재를 채용할 호기가 왔다”고 말했다.

“몸값 낮춰서라도 월동자금 구해야”

투자 유치에 나선 스타트업들은 몸값을 낮추며 불황의 시기를 견디고 있다. 최근 기대치를 낮추고 자금 조달을 마무리한 유 니콘 스타트업은 일단 “겨울은 버틸 수 있게 됐다”며 안도하는 분위기다.

비바리퍼블리카는 2분기 동안 시리즈 G 단계 투자라운드를 진행하면서 당초 1조원 규모 투자 유치를 목표로 했지만 3000억원에 펀딩을 마무리했다. 기업가치는 8조5000억원으로, 신규 조달한 투자금을 제외하면 지난해 6월 평가받은 8조2000억원과 같은 수준이다. 지난 2월 장외시장에서 20조원까지 내달렸던 비바리퍼블리카의 기업가치(발행주식수와 기준가를 곱한 시가총액)는 25일 현재 9조8300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부동산 플랫폼 직방은 3월부터 프리IPO 단계 투자 라운드에 나섰지만, 당초 목표치였던 3000억원에 못 미치는 1000억원에 펀딩을 마무리했다. 기업가치는 2조5000억원으로 당초 예상했던 3조원에 미치지 못했다.

이륜차 물류대행 브랜드 ‘부릉’ 운영사인 메쉬코리아는 유니콘 입성을 목전에 두고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농산물 무역플랫폼 트릿지는 3월 3조6000억원 기업가치를 평가받으며 투자유치에 나섰지만,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투자라운드를 연기했다.

IPO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상장이 임박한 유니콘 스타트업의 밸류에이션도 줄줄이 하락했다. 지난해 12월 프리 IPO 단계에서 4조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컬리는 장외시장에서 1조7300억원의 기업가치를 기록 중이다.

적자 기업이어도 성장성이 있으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할 수 있도록 허용한 ‘유니콘 특례 상장 1호’ 기업인 차량공유 플랫폼 쏘카는 다음달 1일 기관 대상 수요예측을 앞두고 기업가치를 최대 1조6000억원으로 산정했다. 당초 예상 기업가치는 3조원에 달했다.

25년 가까이 국내 벤처투자 업계를 지켜본 한 VC 대표는 “기업을 살리는 게 우선”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기업이 우선 살려면 어제의 밸류에이션은 잊고 오늘의 상황에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며 “카카오, 삼성전자 주가도 반토막 났는데 유니콘 스타트업이라고 다르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자금난을 겪는 포트폴리오사에 한 번은 후속 자금을 댈 수 있지만 두 번은 어렵다”고 딱 잘라 말했다.
불황 때 열린 M&A 큰장…알짜 스타트업 '사냥의 시간'이 왔다 [허란의 VC 투자노트]
허란 스타트업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