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비움·열림·들림
아파트라는 발명품은 반만년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한국인 대부분이 안고 있던 심각한 주거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한 ‘건설 혁명’이다. 백성들의 먹거리 수급을 위한 최소한의 농토마저도 갖추지 못할 만큼 열악한 조건에 처해 있던 이 나라, 게다가 식민 압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나마 유지해오던 주거지마저 통째로 잃어버리는 아픔을 우리는 겪었다.

이런 총체적 한계 속에서 개발의 시대를 관통하며, 한정된 땅 위에 최대량의 주거로 채우는 일. 그 이전의 어떤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넉넉하고, 위생적이며 편리한 주거를 많은 이들이 갖추고 살게 된 사실은 가히 주거와 도시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경제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들 또한 이 주거 시스템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이제 지속적이고 무분별한 공급의 정책을 넘어서, 우리에게 닥친 도시와 주거지의 한계상황을 지혜롭게 개선해 가야 한다.

비움 : 우선 그 집적된 도시의 틈새를 솎아내며 비워갈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살기 위해서 협소하게라도 나눠 가질 수량 확보에 집중하던 시대는 지났다. 채우기를 멈추고 비워야 할 이유는 더 잘 살기 위해서다. 그래서 도시는 잉여의 땅이 생길 때마다 무언가 건설하기보다 비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주거단지 속에서도 더 많은 공유 녹지가 생성되는 계획을 제안하고, 건물에서 막힌 벽과 갇힌 방을 솎아내며, 공중정원을 설치하는 방식도 고려해봐야 한다.

열림 : 이미 장벽처럼 막힌 주거단지를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하늘과 자연을 향해 열린 단지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 가로와 접한 건물의 막힌 벽을 헐고서, 주위의 외부공간으로 투명하게 개방하여 소통하는 방식은, 법제화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거듭 시도해 볼 일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전혀 중시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답답한 도시에서의 ‘열린 가치’와 건물에서의 ‘투명성’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들림 : 현재 주거를 들여다보면 각 세대 간, 또한 건물들 사이의 폐쇄성이 심각하다. 우리가 아파트 현관문을 닫고 들어서면 즉시 이웃과의 단절이 감행되고 만다.

정겨운 우리 전통 가옥에서의 내밀한 안채와 교류하는 사랑채, 안팎의 마당 영역에 따라 이웃 간 서로 정을 나누며 교류할 수 있었던 지혜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통의 누각처럼, 우리네 건축에 이미 존재했던 개념을 현대적인 기술로 들어 올리는 방식은 아래쪽 공간에서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 희망적인 미래 도시와 건축을 향한 하나의 돌파구일 수 있다.

내부로 사적인 생활을 보장받고 밖으로는 열어서 이웃 간의 정을 나누며, 교류하고 배려하는 도시 환경의 개선을 위해 비움, 열림, 들림의 공간 철학을 우리 사회가 공유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