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전직 국정원장의 가벼운 입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존 에드거 후버 초대 국장은 48년간 그 자리에서 정치인과 유명 인사들의 약점을 모았다. 도청까지 해 가며 취합한 정보의 위력은 대통령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미국 대통령 8명이 바뀌는 동안 그는 건재했다. 이른바 ‘X파일’을 쥔 정보 수장의 장기 집권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메이어 다간 국장은 이와 달랐다. 그가 10년간 모사드를 이끈 건 X파일이 아니라 탁월한 능력 덕분이었다. 그는 뛰어난 전략과 전술, 남다른 리더십을 보여줬다. 특히 “지도에서 이스라엘을 아예 없애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한 공로로 국민적 신뢰를 받았다. 입이 무거워 퇴임 후에도 존경받는 글로벌 기업 경영자로 활동했다.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수장들은 대부분 단명했고 험한 꼴도 많이 당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개명한 1999년 이후에도 10여 명이 정치 개입 혐의로 퇴임 후 수사를 받았다. 이 때문에 2020년 박지원 국정원장은 “역대 정부에서 추진했지만 미완으로 남았던 국정원 개혁이 비로소 완성됐다”며 “국정원의 정치 개입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런 그가 물러난 지 한 달도 안 돼 언론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정치인 등의 ‘X파일’을 보관하고 있다”며 “이걸 공개하면 파장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인터뷰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윤석열 대통령의 X파일’까지 언급했다. 파문이 확산하자 “공개 발언에 유의하겠다”며 사과했지만 여론은 싸늘하다.

그는 “특별법을 제정해 (X파일을) 파기해야 했는데 이걸 못해 아쉽다”고 했지만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그가 재직할 당시 여당 의석이 170석을 넘었기 때문이다. 정계 복귀를 위해 자신의 존재감을 높이고 새 권력으로부터 방패막이로 삼으려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인터뷰 말미에 “(민주당에) 복당할 계획”까지 밝혔으니 ‘정치 9단’의 노회한 술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일각에서는 “국정원의 ‘비밀 유지 의무 위반’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전직 국정원장의 입이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은데, 정보기관 수장이 또 수사받는 모습을 봐야 하나 싶기도 하다. 게다가 그의 나이는 만 80세다. 예부터 늙어서 욕심을 부리면 노욕(老慾)이고, 늙은 데 추하기까지 하면 노추(老醜)라고 했는데….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