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유시민의 입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서울대 재학 시절 옥중에서 작성한 항소이유서의 한 대목이다. 그는 1985년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주모자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장문의 항소이유서를 제출했고, 이 글은 세간에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의 조국 사랑이 넘쳐서일까. 정치인, 장관, 정치평론가, 작가 등 다양한 역할을 넘나들며 그만큼 가시돋친 독설로 사사로운 노여움을 표출한 이도 드물다. 2002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DJ(김대중 대통령)가 하야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하고, 이듬해엔 “30, 40대에 훌륭한 인격체였을지라도 20년이 지나면 뇌세포가 변해 전혀 다른 인격체가 된다”고 발언하는 등 정치권, 공무원, 노인 등 폄하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같은 당(열린우리당)의 김영춘 의원으로부터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말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을까”라는 얘기까지 들었을까. 그런데도 그는 “내 면전에 재승박덕이란 평을 해준 사람도 여럿 있지만, 어법이나 행동 방식을 교정할 의향이 없다”며 꿋꿋했다.

그런 그가 인생 초유의 반성문을 쓰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 전 이사장이 2019년 말부터 유튜브 방송 등을 통해 당시 한동훈 검사(현 법무부 장관)가 이끌던 반부패강력부가 노무현재단 계좌의 금융거래 정보를 열람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게 발단이었다. 그는 끝내 의혹을 입증하지 못했고, 사과문을 게시했다. 그는 사과문에서 “대립하는 상대방을 악마화했고,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혔고, 논리적 확증편향에 빠졌다”고 시인했다.

법원은 어제 1심 선고를 통해 유 전 이사장의 명예훼손 혐의를 유죄로 보고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그런데 유 전 이사장은 선고 공판에 출석하면서 한 장관을 겨냥해 “사람이 최소한의 도의가 있다면 전 채널A 기자의 비윤리적 취재 행위를 방조하는 듯한 행동을 한 것에 저한테 먼저 인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 사과문을 비웃으며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듯한 적반하장식 발언이었다. 그러면서 “항소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아전인수식 시각과 독선을 앞세워 다른 사람 명예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입과 행동 방식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유병연 논설위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