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회가 열리던 프닉스 언덕. 프닉스는 ‘숨이 막힌다’는 뜻으로 좁은 공간에 수천 명이 모이다 보니 붙여진 명칭이다. 앞쪽으로 파르테논 신전, 오른쪽으로 연단이 보인다.
민회가 열리던 프닉스 언덕. 프닉스는 ‘숨이 막힌다’는 뜻으로 좁은 공간에 수천 명이 모이다 보니 붙여진 명칭이다. 앞쪽으로 파르테논 신전, 오른쪽으로 연단이 보인다.
한국인의 민주주의 사랑은 극진하다. 지고의 선(善)으로 추앙하는 것은 물론 민주주의가 없으면 당장 세상이 어떻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흥분한다. 애초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말을 일본어로 옮길 때 democracy의 초벌 번역은 ‘하극상’이었다. 나중에 어감을 좋게 해보겠다며 원어에도 없는 ‘주의’를 붙이는 바람에 민주주의라는 희한한 조어가 탄생했다. 수단에 불과한 민주제(制)가 졸지에 가치이자 목적이 된 것이다. 다른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 유명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는 데모크라시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해석은 둘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언급을 안 했거나 혹은 그 단어가 가진 위험성이 너무 커서 피했거나. 작고한 이어령 선생은 링컨이 ‘민주’라는 말이 ‘지배언어’가 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잘 다루면 인민의 권리에 이바지하지만 자칫 통제에 실패하면 나라를 골로 가게 만드는 게 이 민주주의, 데모크라시라는 설명이겠다.

한국인의 민주주의 사랑은 다소 집요하다. 그리스의 아테네 여행을 다녀와서는 민주주의의 숨결을 느꼈다고 후기를 올린다. 초능력이다. 시차를 초월해서 있지도 않은 것을 느꼈다니 놀랍다. 엄밀하게 말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위장한 귀족정이었고 여성과 노예를 배제한 15%의 민주주의였으며 시기심으로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쳐내는 우중(愚衆) 민주제의 표본이었다. 도편 추방은 그 대표적인 예다. 조개껍데기나 도자기 파편에 이름을 적어서 3000표 이상을 획득한 사람을 쫓아냈는데(시민권자 5만 명, 평균 투표자 수 6000명) 현직에 있는 공직자만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좀 있다 싶으면 잠재적 독재자로 몰려 나라를 떠나야 했다. 민주제의 약점은 계속해서 뛰어난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뛰어날 여지가 있는 인물을 미리부터 쫓아냈으니 이런 체제가 멀쩡할 리 없었고 결국 우중 민주의 폐해가 누적된 끝에 아테네는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 그들의 미덕은 다른 데 있다. 애국심이다. 좋은 땅은 침략 대상에서 1순위다. 그래서 주인이 자주 바뀐다. 아테네가 자리한 아티카 고원은 돌밖에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 이런 땅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미친 인간은 없다. 그러다 보니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살 수 있었고 대를 이어 살다 보니 향토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아테네의 공적 공간은 세 곳이다. 신들의 거처인 파르테논, 귀족들의 집합소인 아레오파고스 그리고 민회가 열리던 프닉스 언덕이다. 민회에서는 귀족들도 자주 연단에 섰는데 단골로 등장하는 단어가 공익(애국)이었다. 압권은 아테네 전성기의 마지막 주자 페리클레스의 ‘전몰장병 추도 연설’이다. 연설에서 그는 자유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는 애국심으로 결집되니 모쪼록 전쟁의 공포를 극복하라고 독려한다. 잃는 것은 목숨이요 얻는 것은 존경이라는 애국심 마케팅에 자식 잃은 부모는 위안을 받았고 피 끓는 청춘들은 ‘초개같이 던지련다 이 목숨’ 하며 마음은 벌써 전쟁터에 갔다. 자유와 애국은 아테네라는 폴리스를 지탱하던 두 개의 기둥이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만이 존경으로 보상받은 것은 아니다. 목숨 말고 돈을 던지는 행위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른바 자발적인 세금, 리터지(liturgy)다.

아테네는 자유 시민에 대한 직접세가 거의 없었다. 통행세, 포도주세 등 간접세와 관세가 세금의 전부다. 아무리 인구 30만 명 단출한 폴리스라도 들어갈 돈은 다 들어간다. 기반 시설 관리와 신축을 해야 하고 정기적으로 축제도 열어 도시의 활력을 유지해야 한다. 이때 자발적으로 납세한 것은 부자들이었다. 공권력의 강요는 없었다. 그러나 민심이라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 회피하면 시민들의 눈총을 샀다. 경멸이 따라다녔다. 납세를 피하기 위한 방어수단은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지갑 속을 알 리 없다. 부자 지갑은 같은 부자가 제일 잘 안다.

‘안티도시스’라는 제도는 리터지의 차례가 된 사람이 자기보다 돈이 많은 사람을 지목해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었다. 지목받은 사람은 수긍하고 납부하거나 아니면 누가 더 부자인지 판결을 요청할 수 있었다. 내내 이런 식이면 공동체가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없다. 대부분 부자는 명예를 높이기 위해 기꺼이, 필요한 액수 이상을 내놓았다. 심지어 경쟁도 벌어졌다. 알크마이온 가문이 100을 내놓았으면 다음번에 경쟁 가문이 150을 내놓는 식이다.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리터지는 함선의 건조와 관리였다. 애초 농사로는 답이 안 나오는 땅이었기에 무역도 하고 해적도 때려잡으려면 함선은 필수였다.

리터지를 세금이 아니라 공공기부로 보는 시각도 있다. 내용은 세금이되 형식은 기부로 보는 것이 적당하겠다. 당연히 아테네의 재정은 간당간당했다. 그 허름한 재정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건이 터진다. 페르시아전쟁이다. 황금의 나라 페르시아는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빈곤을 겨우 면한 폴리스 연합체 그리스를 침공했을까. 그리고 그 전쟁의 최종 승자는 누구였을까.

남정욱 작가·전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