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여름 저녁의 일이다. 하늘엔 석양에 물든 구름이 떠 있고, 거리의 플라타너스 너른 잎은 바람에 서걱거린다. 공기는 미지근하고, 종일 햇볕이 달군 땅은 뜨겁다. 나는 모색(暮色)이 짙어지는 길모퉁이에 서 있다. 모색은 낮과 밤 사이 해가 사라지고 드리우는 하얀 어둠이다.

너는 버스를 타고 온다. 내가 버스정류장에서 심장을 두근대며 기다린 것은 너의 얼굴, 너의 웃음, 너의 목소리다. 네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기다림의 순간이 끝난다. 너라는 현존이 내 앞에 나타날 때 나는 기쁘면서도 놀란다.

식물 같아서 날마다 돌봐야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사랑은 타자를 나보다 먼저 환대하는 행위다
기다림은 사랑이 짊어지는 숙명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늘 기다렸다. 덜 기다리는 자가 덜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더 많이 기다리는 자가 더 많이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다림은 사랑을 숙성시키고, 그 결속을 더 단단하게 다진다. 전자문명 시대는 이 기다림의 의미를 탈색시킨다. 기다림은 연인 사이에 불가피하게 생기는 물리적 거리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언제 어디에 있든지 실시간으로 연결하고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과 휴대폰이 나오면서 그 거리를 지워버리는 탓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걸 의심할 수 있을까. 사랑은 외로움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타자를 통해 내 외로움을 해소하려는 행위는 자주 실패한다. 사랑할수록 더 외로워진다. 양희은은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라고 노래한다. 이 가사에 따르면 사랑은 잘 알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사랑은 그 윤곽과 형체가 불분명한 스캔들이고, 부풀린 의혹이며, 실체가 모호한 판타지다. 사랑이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사랑이 인류의 발명품 중 최고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 안의 살아 있다는 기척이고, 사로잡힘이며, 황당한 자기모순에 빠지는 사태다. 사랑은 해방이자 구속, 에로스의 날갯짓, 헌신과 열정으로 포장된 욕망의 몸짓이다. 사랑은 심심함에 대한 모반이고, 사랑은 불멸에의 욕망이 일으킨 불꽃이다. 사랑의 핵심은 에로스인데, 이것은 육체의 헐떡이는 갈망이며 숭고성의 승리에 대한 염원이다. 사랑은 그 자체의 동력으로 할 수 없음을 넘어선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랑은 종종 재난이고 위험한 투자다. 사랑은 뜻밖에도 실존의 위기를 불러온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자는 실제로 죽기도 쉽다.

사랑은 식물 같다. 자라서 무성해진다. 물과 햇빛을 주며 돌보지 않으면 식물은 시들시들하다가 죽는다. 식물을 돌보듯이 사랑도 돌봐야 한다. 식물이나 사랑은 메마름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를 사랑으로 키우는 것은 증여와 환대다. 사랑은 당신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품는 일이고, 나를 당신에게 선물로 내어주는 일이다.

연인들은 애틋함, 관용, 포용력 같은 상징 자본을 베풀거나, 반지나 향수, 꽃이나 현금 같은 실물을 증여한다. 사랑이 깨지면 이 거래도 끝난다. 사랑의 종말은 거래를 청산하는 절차다. 서로에게 준 것을 돌려주고 돌려받는 것은 이것의 파산에 따른 절차다. 하지만 함께 보낸 시간을 정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랑의 정념에는 중립이 없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음만이 있을 따름이다. 사랑은 과열 상태의 이상 지속이고, 그 상태에서 감정 자본을 과소비하게 만든다. 사랑의 누추함과 지저분함을 휘발시키고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낭만적 사랑은 대중에게 늘 인기가 있다. 낭만적 사랑을 그린 ‘사랑과 영혼’, ‘프리티 우먼’, ‘노팅힐’, ‘뉴욕의 가을’, ‘러브 어페어’ 같은 영화에 대중은 열광한다. 낭만적 사랑의 신화에 열광하는 이들이 꿈꾸는 것은 ‘영원한 사랑’이다. 깨지지 않는 사랑,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

사랑이 어떻게 변해요?

그런 사랑은 드물 뿐만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다. 꿈과 현실은 다르다. 사랑은 어긋나고 깨지며, 연인들은 사소한 이유로 등 돌리고 제 길을 간다. 어느 영화의 주인공이 ‘사랑이 어떻게 변해요?’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묻는 장면이 기억난다. 진실을 말하자면, 사랑은 변하고, 변할 수밖에 없다. 죽을 만큼 사랑한다던 당신은 왜 변할까?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는 말의 함의는 사랑의 지속에 대한 맹세다. 현재에도 사랑하고, 미래에도 사랑하겠다는 약속이다. 이 맹세, 이 약속은 자주 깨진다. 사랑은 타자를 내 안에 들이는 일. 타자를 들일 자리를 내려고 자기를 추방한다. 자기 추방은 나의 시간과 삶, 내 몫의 자유, 권리 따위를 포기하는 일이다.

똑같은 업무·회식 반복한다면

사랑은 타자를 나보다 먼저 환대하는 행위다. 타자를 환대하는 방식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이 사랑으로 인류는 지구 행성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렇다고 사랑이 불멸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간이 유한자산이므로 사랑은 한 시절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끝난다.

감정이 끓어 넘치고 춤추게 한 사랑이 끝나면 변화무쌍한 감정을 보여주던 당신은 더 이상 없다. 사랑은 시작과 동시에 끝을 향해 내달린다. 결국 사랑은 어느 지점에서 끝난다. 이게 사랑의 진실이다. 하지만 이 진실은 숨겨진다.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에서 “사랑의 과도함에는 자기 제한이 없으며, 따라서 충동, 욕망, 요구에도 제한이 없다”고 말한다. 과몰입이 키운 사랑은 그 과몰입으로 종말에 이른다. 과도한 열정은 사랑의 촉매제인 동시에 파국의 시발점이다.

어느 날 당신은 등을 보이고 떠난다. 당신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 이 사태는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다. 파탄의 계기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진행되었음에도 당사자가 사랑의 관성에 잠겨 있는 탓에 인지하지 못했을 수 있다. 사랑이 끝난 직후 현실은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린다. 사랑이 만든 예외적인 활기는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공허하고 밋밋한 일상으로 떠밀려간다.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이 택배상자처럼 오고, 똑같은 출근, 업무, 회식이 되풀이하며, 월화수목금토일은 일정한 리듬으로 왔다가 사라진다.

우리가 사랑에 목마른 것은 이것이 충족할 수 없는 결핍인 까닭이다. 당신은 “다시 또 사랑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사랑이 끝나면 회한과 후회가 앙금처럼 우리 내부에 가라앉는다. 이런 앙금을 남기지 않으려면 사랑의 자본을 아낌없이 다 써야 한다. 그것만이 사랑의 환멸과 슬픔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사랑할 때 다 하지 못한 사랑은 더 큰 상처와 후회를 남긴다. 사랑하라, 더 많이 사랑하라! 그래야만 정말 사랑했다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