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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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매대에서 식용유가 사라졌다. 대량 구매가 일상인 창고형 할인마트에서도 1인당 1~2개만 구입할 수 있도록 수량 제한이 시작됐다. ‘포켓몬빵’ ‘허니버터칩’에서나 볼 수 있던 품귀 현상이 필수재인 식용유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곡물자급률 20%도 곧 깨진다…위태로운 韓 '식량안보' [강진규의 식량 안보 이야기]
가격은 두 배가량 올랐다. 18L들이 대용량 식용유 값은 두 달 전 3만원에서 최근 6만원대를 넘보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식용유 품귀와 가격 급등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글로벌 식용유 공급망이 훼손돼서다. 코로나19 사태 여파가 계속되는 시점에 세계 최대 해바라기씨유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공급이 급감했다. 이에 전 세계 팜유 공급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인도네시아는 지난달부터 자국 내 식용유 가격 안정화를 위해 식용 팜유의 수출을 제한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시작해 인도네시아로 이어진 조치가 국내 마트에서의 식용유 품귀 현상으로 이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세계 각국의 동시다발 식량 수출 제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세계 해바라기씨유 수출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유엔세계식량기구(FAO) 자료를 분석한 결과 우크라이나는 2018~2020년 세계 해바라기씨유 수출량의 42.6%를 공급했다. 연평균 공급량은 597만t이다. 러시아는 이 기간 세계 해바라기씨유 시장에서 20.0% 점유율을 기록했다. 이번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씨유 수출은 상당 부분 중단됐고, 러시아도 일부 타격을 입은 것으로 파악된다. 해바라기씨유 공급이 줄면서 대체재인 팜유와 카놀라유 가격이 들썩였다.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은 소매점 판매 제한을 한국보다 먼저 시작했다. 그러다 지난달 말 팜유 주요 생산국인 인도네시아가 수출을 제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픽=신택수 기자
그래픽=신택수 기자
이 같은 수출 제한은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줄을 잇고 있다. 러시아가 6월까지 카자흐스탄 등 인접국에 밀 옥수수 등의 수출을 중단하기로 하자 카자흐스탄 세르비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이 잇달아 식량 수출 통제에 나섰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사태가 터진 이후 식량 수출 통제를 선언한 나라만 35개국이다.

지난 13일엔 세계 3위 밀 생산국인 인도가 밀 수출을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인도는 밀 산지의 기록적인 폭염으로 600만t 이상 생산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자 수출을 제한하고 국내 공급을 확대하기로 했다. 주요 밀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이 지역의 밀 생산이 감소한 데다 가뭄 등으로 다른 주요 생산국의 공급량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문제가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유럽연합(EU) 최대 밀 수출국인 프랑스는 올해 총 강수량이 32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져 밀 출하량이 급감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세계 최대 밀 생산국인 중국은 지난해 가을 이례적인 홍수를 겪었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중국의 올해 밀 수확량은 작년보다 3% 줄어들 것으로 추정됐다. 미국도 50개 주 가운데 절반이 넘는 주에서 심각한 가뭄을 겪고 있다. 미 농무부는 올해 세계 밀 생산량이 7억7482만t을 기록해 전년 7억9287만t보다 2.3%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밀 생산 감소는 2018년 이후 4년 만에 처음이다. 이에 따라 각국에서 쌓아뒀던 재고량도 이 기간 2억7971만t에서 2억6702만t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글로벌 공급망 훼손은 식량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FAO에 따르면 지난 4월 세계식량가격지수는 158.5를 기록했다.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3월(159.3)에 비해 소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이다. 곡물가격지수는 169.5였다. 인도네시아와 인도의 수출 제한 영향이 반영되면 이달 식량가격지수는 다시 상승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자급률 20%…식량위기 가시화

글로벌 식량 가격이 전방위적으로 들썩이면서 한국도 영향권에 진입하는 분위기다. 국내에서 주로 판매되는 식용유는 ‘대두’로 만든 것이라 영향이 작다거나 ‘인도산 밀은 수입하고 있지 않다’는 설명이 나오고 있지만 장바구니 물가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와 다르다. 교과서에서나 강조하던 ‘식량위기 가능성’이 현실화하면서 국민이 잊고 있던 식량안보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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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예견된 결과라는 시각이 많다. 한국의 곡물 수급 지표가 처참한 수준이어서다. 대표적인 게 밀이다. 서구화한 식습관이 퍼지면서 빵 등 밀가루 소비가 대폭 늘고 있지만 국내에서 생산되는 비중은 0.5%에 그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밀 자급률 10%’를 목표로 내걸었지만 임기 내내 자급률 수준은 제자리걸음했다.

99.5%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2020년 기준 밀 수입량은 334만t이었다. 식품에 사용되는 제분용은 미국, 호주, 캐나다에서 전량 수입했고, 사료용은 우크라이나, 러시아, 미국에서 주로 들여왔다. 전쟁으로 수출 급감(우크라이나)이 예상되거나 기후변화 영향으로 생산이 감소(미국)할 것으로 전망되는 국가들이 포함돼 있다. 옥수수 자급률은 0.7%, 콩 등 두류는 7.5%에 그친다. 1970년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로 국내 농촌 지역에서 생산한 곡물을 소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수입 농산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1970년 곡물 자급률이 80.5%에 달했던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개방의 물결과 함께 자급률은 급전직하했다. 10년 만인 1980년 곡물 자급률은 56.0%로 하락했다. 우루과이라운드(UR)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출범은 이를 가속화했다. 농산물 개방 압력과 함께 자급률은 1990년 43.1%, 2000년 29.7% 등으로 내려왔다. 이후 20년간 매년 소폭 감소해 2020년 20.2%를 기록했다. 조만간 20%대가 깨질 것이 자명하다.

곡물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육류도 수입 비중이 늘고 있다. 소고기는 지난해 25만4000t 생산됐다. 전체 수요량의 36.8%만을 국산 한우와 육우가 차지했다. 미국산과 호주산 소고기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돼지고기 생산량은 98만9000t으로 자급률은 72.8%였다. 소고기에 비해 높은 수준이지만 매년 감소하는 추세다. 독일과 스페인 등 유럽의 냉동 삼겹살은 이미 익숙한 상품이 됐다.

농식품 수입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식량안보 위협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그룹이 발표한 지난해 식량안보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71.6점으로 32위를 기록했다. 2017년 26위(73.2점)에서 2018년 27위(72.5점), 2019년 28위(72.8점), 2020년 29위(72.1점) 등으로 순위가 하락하다가 지난해 3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한국과 경제 상황이 비슷하거나 더 나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선 27위에 그친다. 아일랜드(84점), 오스트리아(81.3점), 영국(81점) 등이 1~3위를 기록했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 중에서는 일본이 8위(79.3점), 싱가포르가 15위(77.4점), 뉴질랜드가 16위(76.8점)로 한국보다 순위가 높았다.

세부항목 평가를 보면 한국은 식품 안전성과 빈곤율 등에선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식량 안보·접근 정책에서 0점을 받았다. 식품안보 전략의 수립과 식품안보 관련 부서·기관 설립 등이 미진한 점 등이 순위 하락의 요인으로 평가됐다.

‘쌀 자급률 100%’가 야기한 착시

이런 대내외 평가에도 그간 우리가 식량안보 문제를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쌀 자급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국민이 주식으로 먹는 곡물이 충분히 공급되고 있기 때문에 식량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실제 쌀 자급률은 최근까지도 90~100%대를 유지하고 있다. 2016년 풍년으로 인해 공급량이 소비량을 초과해 자급률은 104.7%를 기록했다. 이후 쌀 의무수입 물량 등이 생기면서 소폭 감소했지만 2020년에도 92.8%로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 작년에는 예상 수요량(추정치) 361만t보다 많은 388만t이 생산돼 자급률이 다시 올라갈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쌀 한 품목만 놓고 보면 식량 위기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밀 등 다른 곡물의 소비량이 늘면서 쌀 수요가 감소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FAO의 농업 전망에 따르면 한국의 쌀 소비량은 2018년 450만t에서 올해 390만t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됐다. 반면 밀 소비량은 같은 기간 370만t에서 400만t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만약 밀과 콩 등 대체 자원의 수급이 악화돼 극단적으로 수입이 완전히 중단될 경우 현재의 쌀 생산량으로는 이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단순히 계산해봐도 작년의 쌀 초과 생산량은 27만t으로 밀 수입량 334만t의 8.1%에 그친다. 정부가 창고에 쌓아놓고 있는 쌀 재고량을 모두 투입해도 밀 수입량을 충당할 수 없다. 쌀 중심의 정책을 펴면서 발생한 일종의 ‘자급률 착시’가 식량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셈이다.

생산성 높여야 하는데…기업 진입 제한

식량 자급률 향상을 위해선 생산 확대와 품목 다변화가 필요하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농업 생산을 둘러싼 여건이 이를 달성하기에 녹록지 않다는 게 문제다.

생산 확대를 위해선 경작지를 더 확보하거나 면적당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국토가 좁고 농업에 어울리는 평지가 적은 국가 특성상 농지를 더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외려 각종 농지까지 주택개발용지 등으로 전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도 쉽지는 않다. 고령농이 다수를 차지하는 농가의 구조적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현재 농가인구 중 상당수는 70세 이상 고령자다. 2010년 65만7499명에서 지난해 72만478명으로 9.6% 증가했다. 전체 농가인구 중 비중은 21.5%에서 32.5%로 11.0%포인트 높아졌다. 고령농이 익숙한 본인의 농사법을 버리고 생산성을 높이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렵다는 게 농업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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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화를 통해 생산성 제고를 꾀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역시 수많은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기업이 농업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맹목적인 주장에 농업에 뛰어들려던 기업들이 사업을 포기했다. 옛 동부그룹은 동부팜한농을 설립해 유리온실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려고 했다. 토마토를 대량으로 생산해 수출하겠다는 게 이들의 구상이었다. 하지만 ‘영세 농민 보호’ 논리에 막혀 사업을 접어야 했다. LG CNS는 새만금 일대에 ‘스마트 바이오파크’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스마트팜 조성 사업이었지만 농민단체 반대로 결국 무산됐다. 대기업이 아닌 농업회사법인 등에서 스마트팜을 건립하는 등 규모화를 추진하는 경우에도 주변 농민들의 반대에 부딪히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

대외 여건은 더 녹록지 않다. 자급률 급락을 야기한 글로벌 무역질서 재편이 다시 예고되고 있다. 역내포괄적동반자협정(RCEP)이 발효됐고,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도 추진 중이다. 농업계에선 CPTPP가 식량안보를 크게 훼손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CPTPP는 회원국 간 상품 관세의 철폐를 꾀하는 협정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CPTPP 가입 시 15년간 연평균 최대 4400억원의 농업 생산 감소가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이는 고스란히 식량 자급률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예외 규정 등을 활용해 식량안보를 훼손하지 않는 수준의 개방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농업계 등에서 나오는 이유다.

식량안보 전담기구 만들고 기업농 육성해야

정부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급률이 낮은 품목인 밀과 콩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밀은 올해 1만4000t을 농림축산식품부가 구매해 비축하기로 했다. 2025년까지 자급률을 5%까지 늘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생산 기반을 다지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농수산식품공사(aT)는 대규모 곡물 비축기지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국내에서 생산한 곡물과 해외에서 확보한 곡물을 함께 저장할 수 있는 저장고를 짓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일본은 농림수산성에 식량정책안보실을 두고 관련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관련 과나 팀 조직도 없는 한국의 농식품부보다 적극적이다. 특히 일본은 자급률 목표와 함께 경지면적 목표를 함께 세우고 있다. 예를 들면 2030년까지 식량자급률 45%를 달성하기 위해 농지면적 414만㏊ 확보를 목표로 제시하는 식이다. 종합상사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의 농업 진출도 적극적이다.

한국도 식량안보 차원에서 기업이 농업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것을 고민해볼 때다. 기업이 농업에 진입하면 제조업 기술을 활용해 적은 농지에서 대량생산할 수 있는 스마트팜 모델을 만드는 일도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영세 농민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면 복지 차원에서 접근할 일이다. 농업 생산성을 훼손하는 방식의 정책은 식량안보를 더욱 어렵게 할 뿐이다. 농식품부 공무원들 사이에서 ‘우리는 경제부처가 아니라 사회부처’라는 자조적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야 한다.

강진규 경제부 기자 jos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