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의 시선] 고환율 고물가 시대의 대한민국 산업전략
외환당국이 달러당 1270원대를 간신히 방어하고 있다. 달러화 초강세 국면에서 나름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다. 시장 개입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1300원 선이 뚫렸을 터다. 원·달러 환율 1300원은 몇 가지 변곡점적 의미를 갖는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 사태 초기에나 보던 환율이다. 지난 5년간의 평균 환율이 모두 1100원대였던 만큼 장기 박스권을 이탈한 가격이다. 1300원은 수출기업들의 환차익 효과를 무력화하는 기준선이기도 하다. 누군가 통계적으로 입증하진 않았지만, 우리 산업계에 내려오는 오랜 경험칙이다. 한국 제품을 수입하는 해외 업체들은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어김없이 제품값을 깎아달라고 요구한다. 환율 상승에 따른 이득을 나누자는 것이다. 달러 표시 가격이 굳어져 있는 반도체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런 압박을 피하기가 어렵다. 결국 수출 제품 단가만 떨어지는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유동성 파티는 끝나고…

[조일훈의 시선] 고환율 고물가 시대의 대한민국 산업전략
환율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지만 원화 약세 흐름을 반전시킬 만한 카드가 마땅치 않은 게 문제다.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고 해외여행은 폭발 중이다. 금리 인상과 고물가로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코로나 경제를 지탱한 소비가 이제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있다. 알고 보니 소비 호황은 각국의 ‘코로나 재정’이 일궈낸 것이었다. 미국 정부가 푼 돈만 4조5000억달러다. 양적완화와 재정 폭주의 양대 잔치가 끝나면 한국 수출의 앞날도 밝지 않다. 실제 올해 무역수지 적자가 100억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그래서 환율 1300원은 여전히 일촉즉발이다. 현 상황은 위기 발발의 5부 능선을 넘어섰다고 본다. 만약 1300원이 무너지면 다음 방어선은 1350원이 아닐 것이다. 당국의 총력전에도 약세로 밀린 통화는 사방에서 물어뜯기게 돼 있다. 환율에는 천장이 없다. 평소엔 바위처럼 움직임이 둔하지만 일단 둑이 무너지면 100 대 1의 교환 비율이 하루아침에 1000 대 1로 바뀔 수도 있다.

경제 위기의 시작과 끝은 외환시장에서 포착되고 확인된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환율은 한 국가의 모든 능력을 압축하는 지표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동안 이 지표를 안이하게 관리하고 평가한 측면이 없지 않다. 지난해 달러당 평균 환율은 1144원이었다. 1년 내내 경상수지가 비교적 큰 폭의 흑자를 냈고 성장률도 4%에 달했던 점을 감안하면 평소 환율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경험 기준으로 50원 이상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시계를 앞으로 돌려본다. 지난해 말 환율은 1190원 선에서 마무리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이었고, 미국 중앙은행의 빅스텝이 가시화하지 않던 시기였는데도 이렇게 높았다. 지금 환율이 1300원 선에 육박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제 국민들이 고물가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고환율이 동행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여기에 글로벌 공급망 교란과 원자재 확보 전쟁이 겹쳐 있다.

이 모든 위기적 요인들의 중심에는 외환시장에 무한 책임을 지고 있는 기획재정부가 있다. 그들은 매년 200억~300억달러 규모의 해외 주식채권을 순매수하는 국민연금에 신경을 쓰면서도 공개적으로 타박하지 않았다.

추경호 부총리 직접 나서야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물가 대책과 연계하는 환율 안정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동안 달라진 시장 환경을 분석해 고물가가 완화될 때까지 수요와 공급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우선 단기적으로 국민연금 해외 투자에 대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국민연금은 해외 투자에 필요한 달러를 모두 외환시장에서 현물로 사들인다. 환율을 끌어올리는 상시적 요인이다. 국민연금은 현재 44% 정도인 해외 투자 비중을 2024년까지 55%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비율 상향폭은 11%포인트지만, 연금 자산이 매년 100조원씩 늘고 있으므로 투자 금액의 절대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은 고수익을 내기 위해선 해외 투자가 불가피하다고 강변하지만, 외환시장의 안정성이 무너지면 경제 전체로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환율 수준에서 투자하는 해외 자산의 수익률이 얼마나 될지도 의문이다. 이 문제는 보건복지부 장관 소관이므로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직접 조정해야 한다.

환율은 무역 역량과 기업 경쟁력의 결과이므로 당연히 산업정책 차원의 대책도 필요하다. 여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첫 번째는 해외로 향하는 기업 투자를 국내로 돌리는 일이다. 지난해 한국 기업의 해외 직접 투자는 759억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외국인이 한국에 투자한 295억달러보다 훨씬 많았다. 이런 투자들이 국내에 남았더라면 일자리 창출과 함께 원화 약세를 저지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두 번째 방안은 중국 베트남 등에 진출한 대기업들의 해외 공장을 한국으로 유턴시키고 해외 법인이 보유하고 있는 이익잉여금을 국내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기업 유턴은 역대 정부가 모두 나름의 청사진을 발표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인센티브 확대는 특혜 논란에 막히고, 높은 인건비와 까다로운 기업 규제, 전투적 노동조합 등의 문제는 그래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반도체 한 트럭만 팔면 해외여행 적자는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고 호언하던 시절은 끝나가고 있다. 이제 반도체만으로는 국제수지도, 환율도 방어할 수 없다. 환율은 철저하게 상대적이다. 미국 기업들이 강하면 한국 기업들도 그만큼 강해져야 적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삼성전자가 ‘6만전자’의 늪에서 헤매는 이유는 자명하다. 스마트폰에서 애플, 시스템LSI에서 퀄컴, 파운드리에서 TSMC와의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름 끼치는 美 산업 패권전략

산업과 기업이 약한 나라의 통화는 결코 강해질 수 없다. 세상이 갈수록 복잡다단해지고 있다는 얘기는 기술의 첨단화, 사회와 문화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데 유효하다. 하지만 글로벌 무대에서 펼쳐지는 기업들의 경쟁과 국가의 부침은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은 전자·반도체·자동차 분야에서 일본 기업과 경쟁하면서 2만달러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일본 기업들의 시장을 잠식하는 데 성공하면서 3만달러 대열에 올랐다. 이제 우리는 3만5000달러 시대에 살면서 4만달러로 올라설 것이냐, 다시 2만달러로 돌아갈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상대는 미국과 중국 기업이다. 한국이 미국 기업들과의 전선을 탄탄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미국은 정부도, 기업도 정말 강하다. 미국 대통령이 삼성전자와 TSMC를 압박해 자국에 공장을 끌어모으는 속내를 알고 나면 소름이 끼친다. 미국은 반도체 칩세트 부문에서 세계 시장의 55%를 장악하고 있다. 인텔이나 퀄컴 같은 기업이 대표다. 미국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팹리스들이 칩을 디자인하고, 이것을 메모리·파운드리 업체가 만들어 다시 미국 칩메이커들에 넘기는 과정이다. 하지만 정작 55% 점유율 가운데 미국 본토 기업의 점유율은 12%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43%는 한국 메모리 업체가 20%, 대만 10% 등의 순으로 분할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들의 생산능력을 본토로 흡수해 칩세트 부문에서 추격을 불허하는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노골화하고 있다. 더 무서운 일은 이 엄청난 프로젝트를 다른 나라 기업들의 돈과 인력으로 해낸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미국법인 투자금이 모자라면 서울 본사가 달러로 송금해줘야 한다. 한국에서 파견한 기술자에게 영주권과 미국 기업 일자리를 주면서 붙들면 애써 양성한 글로벌 인재들도 빼앗길 판이다.

윤석열 정부가 ‘경제안보’ 개념을 새로 들고나온 것은 눈 뜨고 코 베이는 이런 현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을 보호하는 것과 환율을 안정시키는 일이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4만달러 도달을 위해서라도 한국 원화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지금 환율로는 도저히 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