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필리핀의 망각
1963년 개장한 장충체육관은 필리핀에서 지어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설계부터 공사까지 시쳇말로 ‘1’도 관련이 없는데 말이다. 근거 없는 루머라도 많은 사람이 믿을 때는 그럴 만해서다. 1960년 필리핀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254달러로 아시아에서 일본(478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당시 한국은 158달러에 불과했다.

작년 기준 양국의 경제력은 한국 3만4994달러(세계 26위), 필리핀 3687달러(세계 124위)로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세계 순위를 감안하면 필리핀의 국력은 60년 동안 엄청나게 퇴보했다. 가장 큰 이유는 150여 개에 불과한 족벌 세력이 국가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봉건적 사회 구조 탓이다. 이승만의 최대 치적으로 성공적인 농지개혁이 꼽히는 것과 대조적으로,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300년 이상을 군림한 지주 계급이 독립 후에도 그대로 존속했다. 토지개혁이 무산되며 대규모 농장을 계속 갖게 된 지주 계급은 농업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대가로 정치권력마저 쥐었다. 이런 후견주의(클리엔털리즘)로 인한 극단적 양극화가 나라를 쇠락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이번 필리핀 대선에서 승리한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65)의 집안은 북부 루손을 근거지로 한 족벌이다. 그의 아버지 독재자 마르코스의 정적으로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3년 귀국길 공항에서 암살된 베니그노 아키노 2세 집안 역시 대부호다.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와 아들 아키노 3세는 ‘모자(母子)’ 대통령이다. 코라손 아키노에 이은 필리핀의 두 번째 여자 대통령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는 9대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이니, 마카파갈가는 ‘부녀(父女)’ 대통령을 탄생시킨 집안이다.

이번 대선으로 단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인물은 새 대통령 마르코스의 모친인 ‘사치의 여왕’ 이멜다 마르코스(92)다. 그의 호사를 얘기할 때면 구두 3000켤레 외에도 유명 브랜드 팬티 3500장도 종종 입방아에 오른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씨의 옷차림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얼마나 부정적이었으면 ‘한국의 이멜다’라는 표현까지 나왔겠나. 마르코스와 이멜다가 36년 전 ‘피플 파워’로 쫓겨나 미 공군기로 하와이로 망명갈 때 챙겨간 현금만 7억달러가 넘는다. 필리핀 사람들은 어찌 그리 쉽게 잊는지 모르겠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