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방법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소개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동네책방을 사랑하는 시인’이다. 여행에서도 동네책방은 필수 코스다. 가족이 함께 떠난 속초 여행 중에는 ‘완벽한 날들’이란 책방을 찾았다. 몇 권의 책을 집어 들고 카운터 앞으로 가자 책방지기가 알은체를 해주었다. “어제 ‘동그란책’에 가셨죠?” 아이가 코끼리 인형을 들고 책방 앞에서 찍은 사진을 SNS를 통해 봤다고 했다. “일부러 찾아오실 것 같아서 하루 쉬려다 문을 열었어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상태에서도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알아보는 능력이 생겼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은 어쩌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작은 위안일지도 모르겠다.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니 낯선 만남에서 가지던 긴장감은 줄고 상상력은 늘었다.

찰스 스키너는 ‘식물 이야기 사전’에서 식물에 얽힌 설화나 전설들이 식물을 더욱 매력적이게 만든다고 말하며 이렇게 썼다. “우리가 물질적이고 지루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들 하지만, 지금도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상상력을 지녔던 시대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다.” 나는 반문했다. 내가 물질적이고 지루한 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 아닌데? 하나도 안 지루한데?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상상력이 어때서? 책방 사람들이 보여주는 놀랄 만큼 독특하고 멋진 상상력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방법
‘글이다 클럽’은 매주 수요일마다 책방 ‘지구불시착’ 사장님이 줌으로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이다. 정해진 시간 동안 글을 쓰고 함께 읽는 것이 전부다. 혼자서는 괴로운 글쓰기도 함께하면 놀이가 된다. 책방 모임에 대한 나의 집념은 상상을 초월한다. 남편인 이병일 시인과 심하게 싸운 날에도 나는 ‘글이다 클럽’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부부싸움을 글감으로 제공하고 말았다. 한 참가자의 글 속에서 크고 무거운 나의 흰색 트렁크는 모순적 사랑의 상징이 돼 있었다. 그는 내 이야기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을 썼고 그것은 오히려 진실에 가까웠다.

창고에 있던 트렁크에 짐을 싸는 동안 나는 이런 생각들을 했다. 네가 나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잘 살겠지. 요즘 세상에 너 같은 남자랑 살 여자가 어디 있냐? 여기저기 많겠지. 못돼먹은 게 키만 커가지고 얼굴은 내 스타일이야. 요리만 잘하면 다냐? 다지. 후회해도 소용없어. 근데 왜 안 붙잡지? 모든 걸 끝내고 싶은데 헤어지긴 싫어. 나의 내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누추했다. 이런 이야기까지 다 하기엔 ‘글이다 클럽’이 적절한 공간은 아니라고 생각해 말하진 못했다. 그런데도 내가 받아본 글은 놀랍도록 많은 걸 들여다보고 있었다. 많은 소통 전문가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말하지만 내 주변엔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병일 시인과 방학천 철제다리 밑 인동덩굴이 뭉쳐진 곳을 지날 때였다. 귀가 가득 차도록 들려오는 참새 소리에 내가 물었다. “근데 참새가 한 마리도 보이지가 않네?” 그가 손끝으로 인동덩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겉만 보니까. 그렇지. 안을 들여다봐.” 아무래도 참새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조금은 성가신 마음으로 덩굴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는데 깜짝 놀랐다. 정말 덩굴 안이 참새들로 붐볐다. 참새들은 이 촘촘한 덩굴 속으로 어떻게 숨어들었을까? 부리로 깃을 정리하는 참새도 있고, 친구 참새가 한 뼘 옆으로 달아나면 포르르 한 뼘 따라가는 참새도 있다. 소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 북송 황제 휘종이 궁중의 화가들에게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를 그리라고 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꽃향기를 어찌 그리란 말인가. 화원 하나가 말발굽을 쫓아가는 나비 떼를 그린 그림이 휘종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고 한다. 누군가 내게 참새 지저귀는 소리를 그리라고 하면 인동덩굴을 가득 그려 놓으면 될까? 휘종이 깊은 산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절을 그리라고 하는데도 많은 화가가 눈에 보이는 절을 그리는 데 집착했다고 한다. 그 마음도 이해가 간다.

내가 말하지 않아서 알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럴 땐 결심이나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내 의도를 정확히 읽어 내리라는 기대 속에서 과감히 생략하는 용기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상태로 둘 수 있는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절을 그리는 대신 물동이를 이고 산길을 오르는 스님을 그린다면 가까운 곳에 절이 있음을 말해주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을 알게 되니 아름다운 것에 스며들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진다.

▶ 이소연 시인은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쓴 책으로는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와 생태에세이집 《고라니라니》가 있다. ‘켬’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