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고졸신화 함영주가 쓴 '반전 드라마'
금융권에 또다시 ‘고졸 신화’가 탄생했다. 지난달 말 하나금융지주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함영주 회장이다. 그는 충남 논산의 강경상고를 졸업하고 옛 서울은행에 고졸 행원으로 입사해 행장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상고 출신 천재’(공인회계사, 행정고시 차석 합격)로 불린 윤종규 KB금융 회장, 국내 금융계 최고 ‘일본통’ 진옥동 신한은행장까지 이제 고졸 신화는 세 명으로 늘어났다.

KB금융에 두 번 영입됐다가 두 번 물러난 뒤에야 회장에 오른 윤종규의 스토리 못지않게 함영주의 회장 등극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하나금융 이사회와 주주들은 일찌감치 그를 김정태 전 회장을 이어갈 차기 리더로 꼽았다. 독보적인 영업력과 부드럽고 친화적인 리더십으로 초대 KEB하나은행장을 맡아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직원들의 마음을 사고, 주주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런데 그는 6년간 2인자(부회장)로 머물러야 했다. 부정 채용 사건 재판과 금융당국의 징계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나은행장 시절 신입사원 채용에 부당 개입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4년간의 재판 끝에 지난달에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회장 선임 2주일 전의 낭보였다. 하지만 사흘 뒤 악재가 터졌다. 함 회장이 금융당국을 상대로 낸 징계 취소 행정소송에서 패소한 것이다. 하나은행장 재직 때 파생결합펀드(DLF)를 불완전 판매했다는 이유로 문책 경고를 받았다. 최종 확정되면 3년간 금융사 임원으로 취업할 수 없는 중징계였다. 같은 사안으로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이 취소 소송에서 이긴 전례가 있어 함 회장도 승소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정반대 판결이 나온 것이다. 돌발변수가 생겼지만 하나금융 회장후보추천위원회는 최종심 판결 때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기로 했다. 1심 판결이 이사 선임에 결격 사유가 되지 않는다며 주주들을 설득했다. 주총에서 60.4%의 찬성표가 나왔다.

예전처럼 관치금융이 횡행했다면 함 회장은 부회장으로 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당국의 중징계를 받고, 송사에 휘말린 CEO가 자리를 지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억울함이 있더라도 조직을 위해 물러나는 게 관행이었다. 법적 투쟁으로 누명을 벗는 일은 그다음이었다. 윤종규 회장은 국민은행 부행장 때 문책 경고를 받고 물러났다가 대법원에서 명예를 회복했다. 황영기 전 금융투자협회장도 우리은행장 시절의 파생상품 투자 손실 건으로 소급해서 중징계받고 취임 1년 만에 KB금융 회장에서 물러났다. 그 역시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비선을 타고 내려온 청와대의 입김, 서슬 퍼런 금융당국의 칼날에 오너 없는 은행들의 지배구조는 바람 앞에 풀처럼 흔들렸다.

그래서 함 회장의 취임은 금융계에선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정치권과 당국의 개입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다. 하나금융 회추위도 외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과 규정을 원칙대로 밀고 나갔다. 금융당국은 “회추위가 모든 걸 고려해서 결정하지 않았겠느냐. 특별히 언급할 사항이 없다”며 거리를 뒀다. 대통령 당선인 측에서도 “이사회와 주주가 판단할 사안이지 정부와 당국이 나설 문제가 아니다”는 원론적인 입장뿐이었다.

금융업은 대표적인 인허가·규제 산업이다. 실물경제에 자금을 공급하고, 정책 금융을 집행하는 공적 역할도 수행한다. 어느 정도 정부 개입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금융시장의 안정성과 소비자 보호를 위한 관치는 ‘필요악’이란 말도 일리 있다. 그런데 인사 개입은 차원이 다른 나쁜 관치이자 적폐다. 이명박(MB) 정부 때 권력과 친분이 있는 인사들이 주요 금융사를 장악해 ‘4대 천왕’이란 말이 유행했다. 그 이후 금융지주의 지배구조가 정상을 되찾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당선인 주위에 MB 정부 인사들이 포진하자 금융계에서 이런저런 걱정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관치 망령이 부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