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화삼
-목월에게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조지훈(1920~1968) : 경북 영양 출생. 1939년 ‘문장(文章)’으로 등단. 시집 『풀잎단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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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봄날 경주역에서 처음 만난 목월과 지훈
1942년 봄이었습니다. 2년 전 문예지 ‘문장’으로 등단한 청년 시인 조지훈이 같은 잡지로 데뷔한 박목월에게 편지를 보냈지요. 얼굴은 모르지만 잡지에 실린 주소를 찾아 문우(文友)의 근황을 묻고 언제 한번 보자고 썼습니다. 며칠 뒤 목월의 답장이 도착했죠.

‘경주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한지에 이름 써서 들고 기다린 목월

지훈은 그길로 집을 나섰습니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경주 건천역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의 해거름 때였지요. 한가로운 시골역의 플랫폼으로 내려서자 한지에 자기 이름을 써서 들고 선 목월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훈은 스물둘, 목월은 스물일곱 살이었죠. 두 젊은이는 경주 시내 여관방에서 문학과 삶을 얘기하며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했습니다. 낮에는 목월의 안내로 불국사며 석굴암이며 왕릉 숲길을 거닐었지요.

그렇게 열흘 이상 어울리고서야 둘은 헤어졌습니다. 지훈은 고향인 경북 영양의 옛집에 들러 목월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며 목월을 위해 쓴 시 한 편을 동봉했지요. 그 시가 바로 ‘목월에게’라는 부제를 단 ‘완화삼’입니다.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처럼 구절구절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시였지요. 그 운율이 살아 움직여 마치 편지지 속에서 강물이 흘러넘치는 듯했습니다.

그 편지와 시에 감격한 목월은 밤새 화답시를 썼습니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지훈’이라는 부제를 단 시 ‘나그네’가 그렇게 해서 탄생했지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청록파 탄생의 숨은 주역 ‘완화삼’

두 ‘나그네’가 주거니 받거니 대구를 맞춰 짝을 이룬 시가 참 주옥같습니다. ‘구름 흘러가는’을 ‘구름에 달 가듯이’로 받아내고, ‘물길은 칠백 리’를 ‘남도 삼백 리’로 호응했으니 절묘하기 그지없지요.

게다가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은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로,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되살렸습니다. 한창 물오른 두 시인의 감성이 더없이 정겹고 맛깔스러웠지요.

두 사람의 특별한 만남은 광복 후 박두진과 함께 엮은 3인 시집 『청록집(靑鹿集)』(1946)으로 다시 한번 빛났습니다. ‘완화삼’과 ‘나그네’가 함께 실린 것도 이 시집이지요.

『청록집』이라는 제목은 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딴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세 사람이 ‘청록파(靑鹿派)’라 불리게 됐으니, 그 아름다운 인연의 첫 뿌리가 곧 ‘완화삼’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목월의 시 ‘청노루’까지 함께 음미해 보죠.


청노루
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