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집은 나를 닮는다
집은 개인을 닮아 있다고 한다. 방송에서도 유명한 노은주 임형남 부부 건축가의 책 부제는 ‘나를 닮은 집짓기’다. 집이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다. 가족이 추구하는 가치를 닮은 집이야말로 그 가족의 행복을 가져오는 비법이다. 돈이 없어도 그 가치를 국가가 나서서 같이 추구하고 실현해주는 것이야말로 필자는 ‘공간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사는 곳은 경기 동탄의 한 아파트다. 신도시답게 학교 공원 병원 등 쓰임새가 꼭 필요한 공간이 집 가까이 있어 생활이 집을 품은 형국이다. 편하고 안락하다. 신도시를 조성할 때 서울로 출퇴근하거나 그 도시에서 대중교통으로 오고갈 교통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여전히 그 문제를 풀어가는 데 주력하고 있다. 피가 돌 수 있도록, 이 생명체가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인덕원동탄선, 동탄트램 등 산적한 교통 현안이 필자의 과제다.

‘집이란 단순히 비 막고 바람 막고 햇빛 가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피가 돌고 숨을 쉬는 생명체 같다.’ 앞서 소개한 부부 건축가의 책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대통령의 집 역시 마찬가지다. 한 국가를 책임지는 리더의 공간이자, 그 리더를 뽑은 국민의 공간이다.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 같이 일하는 직원들의 사무실 등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 이곳에서 나랏일이 이뤄진다.

대통령의 집, 청와대를 두고 여러 말이 있다. 그곳을 거친 대통령들이 이후 생애가 고단해 터가 좋지 않다고도 한다. 그게 어찌 터 탓일까. 정치라는 영역이 만들어낸 갈등의 산물이 응축됐을 뿐이다. 집터, 풍수지리 전에 정치를 돌아봐야 한다. 다른 것에 근본적인 원인을 두는 것은 일종의 확증편향이다. 해외에 가보면 대통령, 총리궁 등이 도심 한복판에 있다. 작은 공간이라도 상징적으로 둘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해보자. 장기적인 과제인 만큼 국민과의 협의도 필요하다. 광화문시대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도 광화문 시대가 갖는 한계로 염원을 이루지 못했다.

공간의 담을 허문다고 국민과의 소통이 바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대학의 담을 허문 것은 대학이 자리한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담을 허무는 데는 소통을 원하는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국민은 효자동 시대에서 광화문 시대로, 광화문 시대에서 용산 시대로, 그런 담론을 통해 소통이 활발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통은 갈등을 허물겠다는 의지, 국민 앞에 솔직하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집은 사는 사람의 가치를 닮는다. 그 가치가 어떤 가치인지 물어볼 때다.